[나와 당신의 거리] 그래도 저 여자, 계속 걷는다

둘째날 자본_노동_거리

박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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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주>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 동안 15회 인권영화제가 열린다. <인권오름>은 15회 인권영화제가 내건 ‘나와 당신의 거리’라는 슬로건으로 각 상영일의 주제와 연관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 나와 당신이 함께 서 있는 거리, 그리고 더욱 다양한 거리들. [나와 당신의 거리]를 읽고 마음이 술렁이는 당신, 마로니에 공원에서 펼쳐질 ‘나와 당신의 거리’로 나오시라.


1.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초등학생 남매가 피곤해 보였다. 함께 하는 시간을 지루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데 아이들은 연신 쏟아지는 하품을 참지 못했다. 전날 거의 밤 12시에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그쯤에야 퇴근해 돌아오는 아빠를 기다리느라 그랬단다. 아, 아빠 얼굴을 보고 싶은 아이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들.

아이들은 그날만 아니라 늘 피곤했다. 여전히 같은 이유로 밤늦게 자는 아이들에게 그냥 자고 아침에 아빠 얼굴 보면 안 되냐고 물었다. 엄마가 있는데 왜 얘들은 굳이 아빠를 기다렸다 잘까, 그리도 아빠가 좋을까 싶었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문을 열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 대답 속에 아이들이 하지 못하는, 하지 않는 이야기를 새겨듣지 못하고 나는 아주 단순하게 말했다. 엄마가 열어주면 되잖아, 열쇠 갖고 다니시면 되잖아. 남매는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할까 말까 주저했다. 엄마는……. 뜸 들이는 몇 초, 순간 나는 긴장했다. 어떤 어려운 사정이 있을까. 엄마가 혹시……. 아직 다른 아이들이 오기 전, 남매와 나 우리끼리여서 다행이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엄마는 저녁에 일하러 가서 새벽에 오셔요. 밤에 일하는 엄마는 아이들에게 저녁을 챙겨준 뒤 집을 나서서 다음날 아침 아이들이 학교 가기 전에 돌아온다. 아빠가 하는 일도 늘 밤늦게 끝난다. 밤 몇 시간, 중학교 1학년 언니와 함께 세 남매가 지내야 하는 시간. 자기들끼리 시간을 정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컴퓨터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밤을 보낸다.

저희들끼리 맘껏 자유로울까, 아직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가 곁에 있으면 더 편안하고 안심할 나이다. 낮보다 밤에는 집에 없는 누군가가 더 그리울 거다. 엄마가 출근하고 아빠가 퇴근하는 그 사이, 실제 몇 시간 안 돼도 아이들은 끝없이 긴 시간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내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거나 문밖으로 귀를 쫑긋거려 발자국 소리를 기다릴지도. 눈은 텔레비전을 바라보나 마음은 엄마, 아빠에게 날아가 있을지도. 아이들만 덩그맣게 남겨놓고 일을 해야 하는 어른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으리라. 대견한 아이들, 너희들 참 훌륭하구나.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날, 남매 중 동생은 엄마와 아빠가 하는 일을 글로 썼다. 엄마는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고 일러두었지만, 아이들은 안다.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이 감추어야 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무슨 일을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던 아이가 자세히 그 일을 썼다. 아이 마음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밤마다 기다리는 일은 여전하겠지만.

2.

밤 11시 훨씬 넘어 한 여자가 다리를 질질 끌며 힘겹게 걷는다. 여자의 몸과 마음 모든 게 그 다리에 끌려가는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근만근 삶이 다리에 철썩 달라붙은 듯해 쉽사리 여자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뒤에서 걷다 자세히 보니, 여자가 한쪽 어깨에 멘 가방 옆구리 지퍼가 열렸다. 거기서 무언가 삐져나왔다. 저리 가다가는 어디선가 툭 떨어질 텐데. 어쩌면 여자는 자기가 무언가 잃은 것을 모른 채 그대로 무거운 다리를 끌고 앞으로 갈지도. 서둘러 다가가 말해주니 여자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여자와 나란히 걸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는 단체 예약 손님이 들어 평소보다 1시간 30분 늦게 퇴근하는 길이다. 7년 넘게 해 온 일이 식당일이다. 아침 9시에 나가 밤 10시까지 12시간 넘는 노동이다. 찾아보면 8시간 일하고 퇴근할 수 있는 일이 없겠는가만, 그러자면 지금 받는 돈에서 절반은 포기해야 한다. 백만 원이 넘는 돈과 백만 원이 채 안 되는 돈, 없는 사람에게 그 차이는 참 크다. 힘들지만, 한창 먹이고 가르쳐야 하는 고등학생 형제에 조카까지 책임진 여자가 생활비며 교육비며 빠듯하게라도 맞추려면 8시간 일자리는 넘볼 수 없다. 식당 노동자가 되기 전 갖은 일자리를 전전해 본 중년 여자는, 몸은 고돼도 이 일을 하는 걸 다행으로 여긴다. 그 시간만큼, 노동만큼 제대로 받는 돈은 아닐 테지만.

식당일은 대부분 서서 하는 일이라 여자는 다리가 망가졌다. 약으로 버텨왔는데 그 날은 단체 손님 챙기느라 시간 맞춰 먹어야 할 약을 못 챙겨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힘겹게 걷는다. 한 알이든 한 줌이든 입에 툭 털어넣고 물 한 모금 꿀꺽 하면 될 것을, 그때 그이는 자기를 보살필 수 없었다.

3.

저녁이 올 무렵 언덕길, 이른 새벽 인력시장을 통해 하루 일을 나간 사람들이 인력시장 앞으로 다시 모여든다. 더러는 새벽에 타고 간 승합차에서 내리고, 더러는 버스나 전철로 아침에 섰던 자리로 돌아온다. 땀 찬 작업복과 먼지 묻은 작업화를 담은 배낭을 지고. 이쪽저쪽 간판을 단 인력사무소로 들어가거나 길거리에서 일한 삯을 나누어 받는다.

한 여자가 손에 쥔 만 원짜리 몇 장을 들고 자신에게 돈을 준 책임자에게 말한다. 계산이 잘못 되었나. 여자는 얼마간의 돈을 더 받고, 몸을 돌려 채소 가게에서 저녁거리를 산다. 등에는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든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접어든 길은 양쪽으로 골목이 무수하다. 골목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여자와 내가 가야 할 길이 겹쳤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걷는 길. 청바지 입은 가느다란 두 다리가 걷는 내내 잠깐씩 멈췄다. 저 다리로 공사 현장에 섰겠구나. 짱짱하게 섰던 다리가 자꾸 풀리려고 할까. 무릎이 꺾이려고 할까. 눈대중을 믿을 수는 없지만 서른을 얼마 안 넘겨 보이는 여자의 두 다리는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비로소 아프다고 말한다. 그래도 저 여자, 주저앉지 않고 계속 걷는다, 저 멀리.


15회 인권영화제 둘째 날 (5.20. 금) 자본_노동_거리

12:00 이 영화를 훔쳐라! 1 Steal This Film 1
노블 피어 리그 | 2006 | 다큐 | 32분 16초 | E KS
2006년 5월 31일, 비트토런트(Bit-Torrent) 검색 사이트인 파이럿베이(The Pirate Bay)가 스웨덴 경찰에 의해 압수 수색되고 3일 동안 차단되었다. 이후 스웨덴에서는 P2P(피투피) 파일 공유와 저작권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 영화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헐리우드 영화 자본과 미국이 가하는 압력을 고발하고, P2P 파일 공유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2:33 이 영화를 훔쳐라! 2 Steal This Film 2
제이미 킹 | 2007 | 다큐 | 44분 | E KS
5백 년 전의 인쇄기 발명에서 시작된 복제의 역사까지 영화는 지적재산이 교역의 상품으로 전환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저작권 전쟁’의 기술적· 문화적 양상과 이것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개인에게 끼친 문화적· 경제적 영향을 살펴본다. 현재의 상황이 새롭게 변화하는 미디어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13:30 이상한 나라의 서비스 We Sell Emotion
태준식 | 2010 | 다큐 | 23분 | K KS TA
서비스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안전에 관한 이야기.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고 시도 때도 없이 식사시간을 놓치고 유산과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다니는 서비스 노동자들. 웃음을 지으며 매출을 올려야 하는 그들은 일상적인 우울함에 시달린다. 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서비스 공화국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서비스를 강요할 수 있는가.

13:53 5월의 봄 A Death In May
박홍준 | 2010 | 극영화 | 33분 44초 | K KS TA
영화감독 지망생 진영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빚을 떠안을 위기에 처한다. 대부업체 직원들의 악랄한 괴롭힘을 버텨 오던 진영은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는 섭섭함을 낳고, 편견은 오해와 증오를 파생시키며 종국엔 편협한 왜곡을 초래한다.

15:10 악마라 불린 신부 The Devil Operation
스테파니 보이드 | 2010 | 다큐 | 69분 | E S Q KS
수백 년 전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금을 빼앗겼던 페루에서 금 때문에 또다시 싸움이 시작된다. 금광을 개발하려는 거대 외국 기업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농부들의 투쟁, 그리고 기업의 군대 역할을 하는 사설 경호 업체들의 만행이 이에 더해진다. 24시간 사찰과 협박이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금광 개발에 맞서 산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생명에 위협을 느낀다.

16:40 부서진 달 The Broken Moon
안드레 랭겔, 마르코스 네그라오 | 2010 | 다큐 | 72분 | L ES KS
히말라야의 유목민들은 생존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들은 가축을 키워 생계를 유지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하여 소들의 먹이가 되는 풀들이 자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오존층 파괴로 직사광선이 피부질환을 유발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도시로 이주하지만, 그곳에는 빈곤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18:20 잔인한 계절 Cruel Season
박배일 | 2010 | 다큐 | 60분 | K KS TA
해가 지고 번쩍거리는 불빛과 소음이 잦아들면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도시가 토해놓은 오물들을 치우는 문전수거 환경미화원. 그들은 쓰레기를 뒤져 살아가는 ‘너구리’라 자조하지만, 이들은 땀 흘리며 노동하는 우리 자신이다.

19:50 소년 미르-아프가니스탄의 10년 The Boy Mir
필 그랍스키 | 2010 | 다큐 | 95분 | ES KS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소년 미르의 성장과정 10년을 담았다. 악화되고 있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천진난만한 했던 미르의 표정은 불안으로 이어진다. 미르의 삶을 통해 아프간 아이들의 삶 뿐 아니라 빈곤, 여성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말한다.

원어 K한국어 E영어 S스페인어 Q퀘추아어 B버마어 T티베트어 L라다크어
자막 KS한글자막 ES영어자막
장애인 접급권 화 화면해설 더빙 한국어녹음
TA 관객과의 대화
덧붙이는 글
박수정 님은 르포 작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248 호 [기사입력] 2011년 04월 26일 14: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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