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청소년=쯧쯧쯧?] 상식선을 넘어서면 무엇이 보일까?

빈곤/여성/청소년의 성(性)적 권리를 위하여(2)

한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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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연애/섹스는 사회적이며, 경제적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남의 연애사에 ‘청소년인 주제에...’라고 누군가 태클을 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성/연애/섹스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고, 텔레파시 능력이 없는 이상 대개는 돈이 든다. 좀 더 넓게 말해 어떤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경제적이다.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리 안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 못한 존재들(이하 빈곤 청소년)의 성/연애/섹스는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어떤 맥락 속에서 고민해야 할까.

턱없이 부족한 ‘자기만의 방’

가난은 곧 자기만의 공간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만의 방’이란 좁은 의미로 ‘내 방’을 뜻하겠지만, 좀 더 포괄적으로는 누군가의 방해나 간섭 없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여유 등을 의미한다. 가족의 숫자대로 방이 돌아가지 않으니, 자연스레 집안의 모든 곳이 공동공간이 된다. 서로가 늘 부대끼고, 끊임없는 감정노동이 요구되며, 그만큼 마찰도 많다. 언제든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누군가 관찰하고,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다. 사실상 빈곤 청소년들이 사생활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생활이 없다는 건 나만의 감정, 나만의 인간관계, 나만의 비밀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차단된다는 것을 뜻한다. 안정적인 자기 시․공간이 없는 이들에게 사랑, 연애, 섹스는 임시적이고 불안하다. 잦은 상대 교체와 짧은 연애기간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랑과 연애의 기본은 상대방과 친밀한 감정을 나누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그만큼 자주 만나고 싶고, 자주 통화하고 싶고, 때로는 같이 밤을 보내고 싶기도 하다. 용돈은 부족하고, 공부하라며 휴대전화를 뺏는 것도 싫고, 통금 시간도 짜증난다.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니 참고 버티지만, 종종 외박이나 가출을 시도하기도 한다. 만약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사적 공간이 없는 집이 더없이 불편할 수 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제든 아웃팅이 될 수 있는 여건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적 권리는 자연스레 주거권과 접속할 수밖에 없다. 집은 재산이 아니라 권리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주거 불안이 만연해 있는 현실에서 ‘청소년의 주거권’, 혹은 ‘청소년을 위한 독립적인 공간’을 요구한다는 건 참으로 쉽지 않다. 독립적인 공간이 단순히 ‘나 혼자 살 수 있는 집 한 채를 내달라’는 말을 의미하진 않는다. (때로는 그럴 수도 있어야 하겠지만!) 청소년들이 사는 집은 그들의 ‘보호자’의 집이고, 공간 사용의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느냐의 문제로 접근해볼 수도 있다. 그랬을 때, 부모(보호자)와 청소년들의 관계 문제가 중심에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공간의 좁음, 열악한 주거조건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도 필요하다. ‘사랑하고, 연애하고, 섹스하고 싶다. 그러니 안정적인 주거를 마련하라!’는 주장이 배부른 헛소리가 아니라, 권리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드러낼 수 있는 도발적인 주장이 될 수는 없는 걸까. 그것도 청소년의 이름으로.

연애가 정서적인 해방구가 되려면

‘연애를 하면 나만 챙겨주고, 나를 특별하게 대접해주는 사람이 생기니까 좋다’는 말을 한 청소년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연애는 자신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되기도 한다. 학교나 가정에서 존중에 기반한 돌봄을 받기 어렵고, 더군다나 폭력적인 상황에 자주 노출된다면 연애는 정서적인 해방구로 느껴질 것이다. 성적과 집안 배경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는 학교에서 모욕과 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빈곤 청소년들에게 연애는 유일한 오아시스처럼 느껴질 수 있다. 때문에 연애에 더욱더 몰입하고,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상대를 찾기도 한다.

한편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큰 만큼 실제적인 관계에서 오는 실망감도 크다. 주로 연애를 하게 되는 주변 또래의 친구들은 자기 문제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서로를 돌보기엔 역부족이다. 인정 욕구에 대한 갈증으로 연애를 하는 경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갈등이나 소모적인 다툼은 연애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학교나 집에서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ㅠㅠ). 관계를 복원하고 서로의 기대치를 조정하는데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쿨한 이별선언과 함께 새로운 상대를 찾는 작업에 돌입한다. 지나치게 진지한 연애는 촌스럽고, 상처만을 남기기 쉽기 때문이다. 비슷한 유형, 비슷한 패턴의 연애가 놀이처럼 반복된다. ‘애들이 하는 연애 보면, 저런 것도 연애인가 싶다’고 고민을 털어놓는 교사도 있다. 연애는 지속적인 소통이요, 관계요, 조율이라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랑도, 연애도 상당한 에너지와 감정노동을 필요로 한다. 연애를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서로를 탐색할 수 있는 여유, 안정적으로 만남을 이어갈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과 주변의 인정 등 여러 조건들이 맞물려야 연애를 통한 성장 혹은 성숙이 가능하다. 이별했다고 해서 자신이 버려진 건 아니라는 것, 자존심 상해할 문제도 아니라는 것 등을 이야기 나눌 사람도 필요하다. 열악한 환경에서 튼실한 열매가 자라나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 아닐까.

여성 청소년의 특수성

빈곤 가정의 여성 청소년이 경험하는 성적인 차별과 폭력의 결은 복잡하다. 독립적인 공간이 없어 나이를 먹을수록 남자 형제나 아버지의 시선을 늘 의식해야 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뿜어내는 짜증과 스트레스를 조율하는 역할도 맡는다. 엄마 역시 아들보다는 딸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엄마의 조울증과 가족에 대한 애증을 받아넘기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가족 안에서 갈등이 벌어질 때, ‘니가 몸 파는 애냐? 화장을 그렇게 하고 다니게?’ ‘어제는 뭐하다 들어온 거야? 어떤 놈하고 자고 온 거야?’처럼 여성으로서 모욕과 수치심을 느끼도록 공격받는다. 때로는 친족 성폭력에 노출되지만, 사실상 침묵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있기도 하다.

노골적이며, 약탈적인 경쟁 사회에서 성/연애/섹스 역시 경쟁의 도구로 변질되기 쉽다. 남성 청소년들 사이에서 이는 ‘센 척하기’로 드러난다. 센 척은 어디까지나 수치와 양으로 증명돼야 하므로 ‘몇 명이나 사귀어 봤나’, ‘어디까지 스킨십을 해봤나’ 등이 승부의 관건이 된다. 이들은 무용담처럼 ‘진도 나간’ 경험을 떠벌리기도 한다. 그럴 때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여성 청소년은 ‘헤프다’거나 ‘걸레’라는 욕을 듣는다. 동일한 성적인 행위를 해도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다른 평가가 따라다닌다. 남성은 성욕을 느끼고 성행위를 하는 주체로 생각하는 반면, 여성은 남성의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스킨십을 단계론(손잡기- 키스- 섹스)으로 사고하고, 섹스는 절대 안 된다는 식의 성교육을 하는 것은 오히려 스킨십을 남성 중심의 정복의 과정으로 만드는 오류를 낳는다.

이성애자 여성 청소년이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인정받는 것은 자존감과 연결되는 문제기도 하다. 자신을 설명하고 삶을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자원과 수단을 가지지 못할 때, 자신의 ‘몸’이 가진 상품성과 거리를 두기 쉽지 않다. ‘얼마나 연애시장에서 잘 팔리나, 인기가 있나’가 주변 또래집단 안에서 여성으로서의 지위와 권력을 결정한다. 자신의 상품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그녀들을 도덕 불감증으로 몰아세운다고, 외모보다는 내면이 중요하다는 설교를 늘어놓는다고,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게 무슨 절박한 권리냐고?

‘연애나 섹스 좀 못한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그걸 권리로 보장할 필요가 있냐?’는 식의 이야기를 던지는 사람도 있다. 일단은 자신의 사랑과 연애를 ‘인정’받기 위해 ‘목숨’을 건 도약을 해야 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점에서 저 말은 차별적이다. 관계의 단절을 ‘각오’하고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성소수자의 사랑은? ‘다 늙어서 주책’이라는 시선을 견뎌야 하는 노인의 사랑은? ‘제 한 몸 추스르지 못하면서 연애는 무슨’이라는 정서적, 물리적 벽에 맞서야 하는 장애인의 사랑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욕망을 모조리 유예하길 강요받는 청소년들의 사랑은? 사랑과 연애, 섹스가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프리 섹스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누구에게만 성(性)이 그간 자유로운 영역이었는가’를 질문하는 과정이며, 그 성역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밥을 굶는 것과 사랑에 굶주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인권은 사람이 밥을 굶지 않고 ‘생존’하는 것을 넘어 행복하게 ‘삶’을 사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지 않나? ‘연애가 무슨 권리냐?’에서 ‘연애마저 못하는 사회는 살 만한 사회인가?’로 질문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청소년들이 생존조차 보장받고 있지 못한 현실, 청소년 인권의 중요 구호가 여전히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 때리지 말라’인 현실에서 ‘사랑하고 연애하자’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큰 지장 없는 권리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생존을 넘어 행복을 꿈꾸는 것이 인권이라면, 청소년들의 권리 항목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이 모든 권리들을 지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298 호 [기사입력] 2012년 05월 16일 14: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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