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냥의 인권이야기]이름을 빌려 사는 사람들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사회

진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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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부동산을 많이 들락날락 거렸다. 가족과 함께 살다가 방을 얻어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변의 청소년들도 탈(脫)가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전부터 밤11시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동네 놀이터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꿈을 꾸며, 모두 한 동네에 방을 얻어 살기로 했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각자의 집을 구하고 옹기종기 한 동네에 모여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성년이 안 된 청소년들은 직접 부동산 계약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동산에도 같이 가고 계약서 사인도 ‘어른’인 내가 대신 해야 했다. 시나리오도 짰다. 내가 언니고 넌 스무 살짜리 동생이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어서 법적으로 만 20세는 아니다. 그래서 내가 계약서를 쓰는 거다. 이 근처 대학을 다닌다고 하자. 무슨 과라고 하지? 등등등.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버린 일상

생계를 유지하려면 일도 구해야했다. 청소년들에게는 온갖 핑계를 대며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불법자들이(노동법을 위반하니까 불법!) 보호자 동의서 없이는 노동할 수 없다는 조항만은 잘 지켰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내용의 시나리오를 짰다. 가정형편이 복잡한 집과 사이가 안 좋아 잠시 집을 나온 사촌동생의 이야기였다. 나는 집안의 평화를 위해 잠시 그 사촌동생의 후견인 노릇을 도맡아 하고 있는 참한 직장인 사촌누나의 역할을 맡았다. 보호자 동의서 사인을 하러 갔고 가게 사장님과 상담도 했다. 매일 매일 다른 시나리오로 거짓말을 하는 일상이 한동안 계속 됐다.

그러다 얼추 일자리도 구해지고 이사도 끝냈다 싶던 무렵, 친구가 직장에 일하러 간 사이에 친구 집에서 놀고 있던 청소년들이 점심으로 뭘 해먹으려고 했지만 도시가스가 연결이 안 되어 있었다. 가스회사에 전화를 해서 설치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청소년들은 설치 기사를 불렀다. 하지만 법적 성년이 아니라 계약을 할 수 없었다. 근처에 사는 아는 ‘어른’에게 대신 계약해달라고 부탁했고 그 ‘어른’이 바로 달려왔지만 설치기사는 계속 실제 거주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며 집을 두리번거렸다. 집나온 ‘애들’이 모여 사는 곳에 도시 가스 설치를 해주는 게 내키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 집나온 ‘애들’은 난방도 안 되고 라면도 못 끓여먹는 집에 살아야 하는 걸까? 실랑이 끝에 도시가스 설치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은 월세 계약서에는 내 이름이, 도시 가스 계약서에는 내 친구의 이름이 그리고 수도 계약서에는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복잡한 집이 되었다. 그 중 실제로 그 집에 사는 청소년의 이름은 한 군데도 적혀있지 않다. 반면에 내게는 쓰지 않는 집의 월세 계약서, 내가 쓰지 않는 휴대폰, 내가 쓰지 않는 은행 계좌와 체크카드들이 생겨났다.


존재를 숨길 수밖에 없는 사회

수도, 가스, 주택 임대 계약, 근로 계약, 인터넷, 휴대폰, 의료보험, 은행계좌, 체크카드… 이 사회에서 사람이 사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신용불량자(사실 신용불량이라는 말은 법적으로는 사라진지 오래된 말이다. 신용등급제가 생겨나면서 10등급 등의 말로 표현된다), 파산자, 개인회생 등의 신용회복과정 중인 자, 특정 분류의 장애인, 특정 분류의 환자, 어린이‧청소년, 노숙인, 일정 나이 이상의 노인 등. 사람이 사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본인의 이름으로 만드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 사회에 사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결국 그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계속 남의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화차(변영주, 2012)」에서도 생존을 위해 이름을 얻고자 살인을 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배트맨 시리즈의 최근작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에서는 자신의 이름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삭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캣 우먼(셀리나 카일)이 나온다. 과거 여성과 노비에게는 이름이 지어지지도 않았다. 군인과 학생 그리고 죄수들은 이름을 지워진 채 번호로 불리는 것을 가장 먼저 배운다. 즉 이름은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혹은 그 존재가 부정되는가의 잣대인 것이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모두가 이름을 가지고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 수 있을까.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지 않을 수 있는 건 언제쯤일까. 그게 그렇게 큰 소망인가.

덧붙이는 글
진냥 님은 "교사로 밥을 벌어먹은지 십년차. 청소년들의 은혜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16 호 [기사입력] 2012년 09월 26일 11:4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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