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의 인권이야기] 제도의 외피가 주는 것은 무엇일까?

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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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 잠깐 까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참 이슈 중인 결혼 평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친구는 자기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고 되묻자, 친구는 오래 전부터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냥 한 집에서 내가 책임질 사람, 나를 이후에 책임질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건 결혼하고 싶은 욕망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하고 되물었다. 친구에게는 기간은 짧지만 잘 사귀고 있는 동성 애인이 있다. 친구는 애인과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라고 하였다. 애인은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과 애인과의 연애는 별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도 (싱글이라는 어려움은 있지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상황인데, 왜 친구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표현하는지에 관해 궁금해졌다. 굳이 '결혼' 혹은 '제도'라는 코드로 다루기 시작하면 더 복잡한 상황들이 벌어진다. 친구가 함께 살고 싶은 건 그저 '친구의 욕망'일 뿐, 애인과의 관계에서 나온 욕망은 아니다. (친구 표현에 따르면 내가 낳거나 입양하면 내 애이고, 상대가 낳거나 입양하면 상대 애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와 애인의 관계가 결혼과 같은 공식 제도로 읽히기 시작하면 친구와 친구 애인은 그런 명쾌함이 없는 '피치 못할 공동의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위험' 들이 생긴다.

경우는 다르지만 비슷한 사례를 이성애자 여성들 사이에서도 경험한다.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의 경우, 소위 이야기하는 결혼의 시기가 지났다. 직장 동료는 남자랑 살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지만, 아이는 낳고 싶다고 한다. 직장 동료의 선배들은 '우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은 후 이혼하면 훨씬 쉽다'고 직장 동료에게 조언한다. 결혼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애를 낳으면 사회적 시선 때문에 감당하기 너무 어렵지만 일단 결혼한 관계에서 애를 낳은 후 이혼하고 애를 키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도 본인의 욕망에 비추어 보았을 때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실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많지 않다. 결혼은 '주변의 시선으로부터의 안정'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일 뿐이다. 결혼 제도는 양육권 다툼에서 본인의 양육권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가지는 힘은 실제 제도가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상관없다. 잠깐 결혼식을 올리든 결혼 비슷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인정받든 그건 그 자체로 개인이 이후 양육 등으로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는 힘이 된다. '결혼'이란 바로미터를 통과하지 않는 개인이 그려나갈 수 있는 미래는 그저 제한적이다. 그건 결혼이 실제로 얼마나 개개인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느냐와 상관없다.

친구나 직장 동료의 사례에서 '아이와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 자체는 안정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이와 함께 사는 경험은 개개인의 삶에서 더 큰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외피를 둘러싸지 않았을 때 이들의 삶은 더욱 더 상상하기 어려운 삶이 되곤 만다. 실제 이들은 지금도 얼마든지 애를 키우고 살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간격이 제도와 실제 사이에 존재한다.
덧붙이는 글
토리 님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이반스쿨 소속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59 호 [기사입력] 2013년 08월 21일 14: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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