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숙폭동] 청소년의 생명은 조에(zoe)인가 비오스(bios)인가?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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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986호(2013.11.18) 표지에는 박근혜 씨가 한복 입은 모습과 함께 ‘L’état c’est moi(짐이 곧 국가다)라는 글씨가 겹쳐져 크게 인쇄되어 있다. 이른바 ‘봉건군주(적 통치방식)의 도래’를 알리는 도발적 ‘카피라이팅’이다. 내게 봉건군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를테면 교수대에 매달린 반역자와 시민들과 같은 죽음의 모습들이다. 실제로 사회학자 푸코는 군주의 타자에 대한 생사여탈권, 즉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이 전근대 사회 통치술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 근대사회(자본주의사회) 통치성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 하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한겨레21>의 비유처럼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봉건군주의 권력 아래에 살고 있는 것인가? 바꿔 질문하면, 권력자가 박탈하려는 것은 우리의 조에(말 그대로 목숨으로서의 생명)인가? 아니면 비오스(정치적 생명)인가?


‘생명권력’ 개념을 바탕으로 국가에 의해 통치되는 삶들에 대해서 탐구한 대표적인 사람은 아감벤이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시민사회를 참고하여 조에(zoe)와 비오스(bios)라는 삶 개념을 끌어온다. 조에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되는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하는 것인 반면, 비오스는 “한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한다. 조에가 물리적으로 살아있다는 뜻 그 자체라면, 비오스는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원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존재성을 뜻한다.

국가가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은 시민들의 비오스이다. 국가의 통치에 유익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특정한 비오스를 시민들의 몸과 마음에 기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생명권력(“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을 발휘한다. ‘어떤 방식으로 살 것인가?’라는 비오스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해 국가는 끊임없이 감시와 규율을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주입이 이루어지는 대표적 공간이 학교이다. 단언컨대 학교는 학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국가(통치자)를 위한 공간이다. 학교가 군대와 감옥의 모습을 닮은 연유는 그 존재이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학교는 보호와 선도라는 명목으로 의무교육이라는 명령을 통해 전국에 있는 각 가정의 청소년들을 차출한다. 또한 학교는 동일한 형태의 교실 안에 배치하고, 동일한 교과서와 동일한 교육과정을 가지고, 동일한 교육관에 의거하여 ‘학생’이라는 예비국민을 생산해낸다. 이러한 특정한 종류의 국민을 생산해내고 조작하는데 동원되는 학문 중 하나가 ‘통계학’이다. 통계학은 어원적으로 따지면 국가학(statics: state + tics)이라 명명할 수 있다. 개인단위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을 넘어서서, 무리 전체를 인구라는 수치를 통해서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절 및 조작한다.

여기에서 국가에게 가족이라는 단위는 매우 유용한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가족은 출산, 양육과 보살핌이라는 재생산노동을 공적 비용의 투입 없이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에게 성(섹슈얼리티)이란 ‘임신과 출산, 양육이 가능한 이성애주의 남녀의 혼인관계’라는 조건을 공리로서 가정하고 있다. 학교의 보건교육이나 성교육, 청소년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각종 성 담론들이 이성애주의 정상가족담론을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교의 이와 같은 이성애주의 정상가족담론에 동의하지 않는 청소년은 조에마저 위협받는 호모 사케르(*)의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이 1위이다. 이 수치는 ‘한국의 교육통치시스템’(**)이 청소년의 생명을 비오스와 조에로 구분 지을 정도로 강력한 압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살예방책으로서 생활지도 강화 대신에 차라리 청소년들에게 학교를 떠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까운 생명들을 얼마나 많이 구할 수 있었을까. 학교와 가정은 청소년에게 기입되는 섹슈얼리티 비오스를 거부하는 청소년을 모두 절벽으로 몰아넣는다.

예를 들자면, 피임도구를 당당하게 구매하기도 어려운 청소년이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암담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른들은 사후피임약은 물론이거니와, 낙태수술도 불법으로 만들어 놓았다. 학교는 학생이 임신한 경우 합당한 지원과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퇴학이나 전학을 권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교와 사회에서 주장하는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섹슈얼리티에 파멸을 선고한다. 파멸이 있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금지하기 위해 파멸을 만든다. 따라서 화장실에서 출산하고 아이를 버린다든지, 자살을 택하는 일 등은 비정상적인 일탈청소년들의 파국적 결말이 아니라,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정해진 파멸의 노선에 따른 지극히 정상적인 종착지이다.

몇 년 전에는 남자친구가 있는 여학생들이 ‘낙태계’를 든다는 실상이 알려져 사회가 들썩였던 적이 있다. 나는 청소년들의 충격적 일탈을 개탄하는 언론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희미한 상부상조의 징조가 나타났다며 오히려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파국에 놓여있는 호모 사케르는 서로를 돕는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기에 서로 도울 수밖에 없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청소년의 생명은 비오스인가, 조에인가?’ 지금까지 결론은 청소년에게 주어진 것은 유사비오스이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조에마저 박탈될 위험으로 몰아넣어진다. 청소년에겐 학급회의, 전교학생회 같은 유사민주주의들, 운동회 반티를 결정하는 유사자유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자유와 권리도 허용되지 않는다. 가족과 학교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선택할 권리를 유예시키고 특정한 비오스(모범학생이라는)만을 강요한다. 인자한 얼굴을 한 채 사랑과 보호라고 말하는 말 뒤에 파국이라는 경고를 감춘다. 이러한 체제는 모성애파시즘이라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청소년은 유사시민(겉은 시민인데 속은 노예인)과 범죄자(사형을 선고받은 범법자)의 경계에 서있다. 그리고 청소년과 같은 호모 사케르 앞에서 통치자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불량식품까지 간섭하는 4대악척결과 같은 박근혜 정부의 인자한 손길을 연상해보라. 그녀는 전 국민의 어머니인 것이다.

신의진 의원(새누리당)이 발의한 4대 중독 관리법, 김희정 의원(새누리당)이 발의한 학교밖 학업중단 청소년지원법은 이러한 생명통치의 연장선 하에 있다. 학교밖 학업중단 청소년지원법이 지원이라는 인자한 얼굴 속에 관리와 통제라는 발톱을 감추고 있음을 탈학교청소년들은 이미 예지하고 있다. 통치자는 학교를 탈출한 청소년들을 다시금 나이스(학교생활기록부)에 등재하여, 행동을 규제하고 사회적 낙인을 찍을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학교밖 학업중단 청소년지원법이 새로운 비오스를 얻고자 하는 청소년들을 다시금 조에를 걱정하는 호모 사케르로 만들고자 하는 법이라면, 4대 중독 관리법은 비청소년들(성인들 혹은 예비청소년들) 또한 청소년처럼 관리와 보호의 대상으로 유사비오스를 가진 호모 사케르로 편입시키기 위한 법이다. 술, 마약, 도박은 물론 게임을 즐기는 사람마저도 중독의 대상이므로 정부가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도 죽음뿐인 삶이 있고, 죽어도 살 수 있는 삶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쯤에서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만국의 (예비)청소년들이여 봉기하라. 잃을 것은 가짜 생명뿐이요, 얻는 것은 진짜 생명이다.
덧붙이는 글
환희 님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70 호 [기사입력] 2013년 11월 20일 15: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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