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으로 읽는 세상] 친미만을 강요하는 한국식 전체주의

리퍼트 기습사건과 한국사회

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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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당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다면 돌을 던져 보라. 그곳이 호수인지, 모래밭인지, 시멘트 바닥인지 알게 될 것이다. 파장의 양상과 충격의 강도로 알 수 있을 것이다. 3월 5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에 대한 기습폭력은 한국사회의 정치 지형을 뚜렷하게 알게 해준 돌멩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약칭 민화협) 초청 강연에서 우리마당독도지킴이 대표인 김기종 씨가 흉기로 리퍼트 대사를 공격한 이후에 나타난 정부와 언론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모습은 한국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우리는 ‘종북이 한미동맹을 테러하다’는 프레임이 지닌 폭력과 촌극을 보았다.

여전히 유효한 종북 공안몰이

먼저 김기종 씨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기는 했으나 폭력을 행사한 과정이나 배경 등 진상이 파악되기 전부터 언론과 정부 여당은 ‘종북 세력의 테러’라고 규정했다. 경찰은 김씨에게 살인 미수 혐의 적용을 검토했으나 검찰은 수사 지휘를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에 맡겼다. 이번 사건을 “정치적 목적에 의한 테러 범죄”로 접근한 검찰은 압수한 서적 등 10여 점에 대해 이적성이 있다고 보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입증하려 애썼다. 살인미수사건에서 국가보안법 사건, 종북공안 사건이 되었으니 정부의 공안몰이는 더 심해질 것이다.

그동안 보수정치세력은 종북 프레임으로 한국사회를 가르고 공안정치로 지지기반을 확대해왔다. 그들은 이번 사건을 보수정치의 유효성을 확인해주는 ‘사건’으로 규정하고 퍼뜨리려 하고 있다. 또한, 4월 재보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치권은 이번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이용하려 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리퍼트 대사를 병문안했을 뿐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도 중동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세브란스병원에 있는 리퍼트 대사를 방문했다. 새누리당은 김기종 씨가 노무현 정권 시절부터 북한을 갔으니 민주당이 ‘종북의 숙주’라고도 했다. 그리고 항간에는 행사의 주최 측인 민화협의 대표인 홍사덕이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이고 민화협이 김기종의 행사장 입장을 저지 안 했으니 이번 사건은 자작극이라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번 리퍼트 기습사건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공안 법안이 쉽게 통과될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새누리당은 테러방지법안 통과와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테러방지법은 미국의 9‧11테러 이후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했던 것인지만, 국가정보원 등 공안기구가 자의적 기준으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어 인권단체들을 비롯한 시민사회가 막아온 반인권 법안이다. 사드(THAAD)는 동북아평화, 다시 말해 중국과 러시아의 안보․외교적 이해관계가 직결된 민감한 사안이라 정부도 쉽게 추진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리퍼트 기습 사건 이후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상승하자 정부‧여당은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시민들의 입과 발을 묶겠다는 심산으로 이를 밀어붙이고 있다.

위 사진:출처 : AP뉴스

반미는 상상불가능한 사회

이번 사건에 대해 언론과 정치권이 내놓은 둘째로 많은 해석이 ‘한미 동맹에 대한 테러’이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만이 아니라 한국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도 이 프레임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사건 다음날 대통령은 "이번에 범행을 저지른 사람의 반미와 한미 군사훈련 중단 등 극단적인 주장과 행동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대다수 우리 국민들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말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친미'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한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약소국을 침략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군사적 긴장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도 우리는 ‘친미’를 주장해야 하냐고. 한미동맹이라는 것이 그저 나라 간의 우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기본 전제로 한 것이라면 우리는 한미동맹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과 인권이 우선이라면 전쟁을 전제로 한 친미가 아니라, 평화를 기반으로 한 외교정책이 우리의 선택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미국은 국제경제와 정치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군사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일본 정부의 재무장에 대해서도 침묵한 채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를 서두르고 있다. 미사일방어체제(MD)는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의 핵무기가 미국에 떨어지기 전에 공중에서 요격하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북한은 가까워서 저(低)고도 미사일로 충분한데도, 고(高)고도 미사일방어체제인 사드(THAAD)를 배치하겠다는 것은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해왔다. 얼마 전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 촉구를 민족주의로 치부하며 잊자고 망발을 한 이유도 한‧미‧일 군사공조를 성사시키고 싶어서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이 취해야하는 태도는 좀 더 주체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조선시대 왕조가 명과 청 사이에서 사대주의를 취하거나, 구한말 열강들 사이에서 정부가 갈팡질팡하며 백성을 져버렸던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지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외교적‧군사적 관계는 무조건적인 ‘친미’가 필요한 게 아니다. 아니 한발 양보해서 친미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친미만을 강요하는 ‘전도된 전체주의’

자유민주주의는 곧 친미라는 정부의 접근은 셸던 월린의 책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떠올리게 한다. 월린은 미국의 역사와 부시 대통령의 집권과정과 정치를 분석하면서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도된 전체주의’라고 명명했다. 9‧11테러 이후 반공이데올로기와 공포정치는 민주주의를 애국주의로 탈바꿈시켰고, 사영화(私營化)된 언론에 의해 시민들의 비판의식은 잠식되어 수동적인 시민들이 양산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민주주의’는 정치권력과 기업권력에 의한 ‘전도된 전체주의’로 나아갔다고 보았다. 그는 나치즘과는 다른 현대 미국사회의 전체주의 경향을 그렇게 표현했다. 지금 민주당 오바마가 집권했다고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미국은 IS 공습과 사드(THAAD) 배치 등 테러와의 전쟁을 강조하며 군수산업을 기반으로 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사회의 모습은 한국과 너무나 닮았다. 종편을 중심으로 한 언론의 편향된 보도와 자신의 경제적 이득만을 노리는 친미적인 정․재계 엘리트로 가득한 한국사회의 정치에서 ‘시민-민중’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다. 사드(THAAD)는 평화만 위협할 뿐 아니라 엄청난 세금, 리베이트로 배를 채우려는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끌어올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사드(THAAD)인가, 누구를 위한 친미인가! 그런데도 정작 언론은 한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은 채 리퍼트 대사의 아들 중간 이름에 한글이름이 들어갈 정도로 한국 사랑이 크다는 점만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한미동맹은 깰 수 없는 절대선이라는 공식이다. 그 공식에 균열을 내지 못한다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평화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도 구할 수 없다. 국내정치이든 국제정치이든 우리가 적극적으로 만들 사회의 상, 평화의 상을 중심으로 국제관계를 구축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전쟁의 미래’로 빠져들 수 있다. 1991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여 형식적으로는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였고 한국은 소련과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아직 북한과 미국, 일본의 외교관계는 없으며 남북은 서로를 국가로 존중하며 평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있다. 따라서 북‧미‧일의 평화적 외교관계를 만드는 과정에 우리도 중요한 행위자라는 점을 망각한 채 친미만을 외친다면 평화는 요원하다.

부채춤과 석고대죄라는 희극 앞에서

그리고 더욱 민망하고 안타까운 것은 부채춤과 석고대죄 단식이라는 희극이 가능한 획일적인 외교-국제관계에 대한 시선이다. 며칠 전 한 개신교 교단 소속 교인들이 한복을 입고 '마크 리퍼트 쾌유 기원'을 위한 기도회를 하고 부채춤과 북춤을 추는 것도 모자라 대통령의 제부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가 병원 앞에서 리퍼트 대사의 쾌유와 굳건한 한미혈맹관계를 위해 ‘석고대죄 단식’을 했다. 그는 “큰 틀에서 놓고 보면 한국은 미국의 분신이고 미국은 한국의 분신이며 완전한 형제의 나라”라고 했다. 분신이라고 칭할 정도로 미국에 대한 맹목적 태도는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와 닮아 있다. 어디에도 자국민의 생명과 평화, 인권을 내밀 수 있는 틈이 보이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처럼 우스꽝스러움과 공포가 공존하는 맹목적 친미가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평화롭게 살 권리와 전도된 전체주의를 넘어 민주주의를 제대로 만들어 나가는 일이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덧붙이는 글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29 호 [기사입력] 2015년 03월 11일 18: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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