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의 인권이야기] 함부로 사랑한다고 하지 마세요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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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나 보육 관련 직업이나 청소년지도사 등의 직업을 가진 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표현이 있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청소년들을 사랑해서 이 일을 선택했고 계속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사회적으로도 그러한 양육이나 청소년 관련 일을 하려면 청소년,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요건처럼 나오곤 한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생님’이어야 좋은 선생님이라는 믿음도 굳건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아이들을 사랑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예컨대 나는 개를 좋아한다. 그래서 개와 같이 있는 것이나 개를 돌보는 일이라면 비교적 즐겁게 할 수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개의 생김새나 행동거지를 친숙하게 예쁘게 느낀다는 뜻이다. 내가 개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개들이라면 다 좋아하거나, 그 개들 하나하나를 알고 이해하고 싶거나, 또는 그 개가 나를 알고 이해해주길 바라거나,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거나, 헌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관련 직업 종사자들이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라는 말은 이런 것과는 다른 의미의 말이지 않은가?

만일 어떤 종사자가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사람들과 나이가 적은 사람들의 특성들이 친숙하고 즐겁게 느껴진다고 얘기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니까. 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취향이 아닌 감정의 문제이다. 표현의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청소년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마음을 쓰는 것이나 훈훈하고 낭만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일 때가 많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감정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단지 ‘아이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가 있나? 종사자들이 만나는 청소년들은 보통 연간 수십 명, 수백 명에 이른다. 그만큼의 사람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면 당연히 서로 안 맞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비호감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사람들 하나하나를 잘 알고 관계를 맺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아이들, 혹은 자신이 만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감정일지 상상하기 어렵다. 더 강하게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과 마주하지 않고 단지 종사자라는 위치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을 과연 진중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런 감정을 직업적 의무로 가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일지 의심스럽다.


친근감이나 애정 표현의 권력

내가 ‘아이-사랑’ 문제와 비슷한 종류의 문제로 떠올린 것은 ‘장애우’였다. 장애인을 부르는 호칭으로 친근감을 담겠다고 ‘벗 우(友)’를 넣어서 만든 말이지만,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을 부르는 말이라는 비판, 장애인이 다 당신들 친구냐는 비판 등을 받고 있다. 아마 처음 만든 사람은 동반자 관계라는 뜻을 담아 만든 말이었을 듯싶지만,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자의적으로 친구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렇듯 권력관계는 종종 일방적인 친근감이나 애정 표현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OOO 친구”라는 말을 많이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친구”에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라는 뜻을 등재해놓고 있다.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을 낮춰 부르는 완곡한 방식으로 친근감을 담은 “친구”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나이가 적은 사람,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친구로 삼을 수 없다. 오직 윗사람의 아량과 의사에 의해서만 ‘친구’가 된다. 프랑스에도 비슷한 언어 관습이 있다고 알고 있다. 일전에 한번 한 청소년활동가가 기자회견에서 이런 관행을 비꼬아서 “우리 교사 친구들”이라고 발언을 했지만, 그 말에 담긴 비판의 뜻을 읽어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됐을까. 그저 한없이 어색한 이색 발언 정도로나 기억되지 않았을지. 친구 아닌 사람한테 친구 소리를 하는 것도 무례함이라는 생각이 언제쯤 뿌리 내릴 수 있을까?

무슨 말 표현 하나를 바꾸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친근감이나 애정 표현의 외피를 취하고 작용하는 권력관계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고, ‘사랑’이나 ‘친구’라는 말 속에도 그런 불평등한 관계와 인식이 얼마든지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관계의 거리나 감정의 거리를 좁힐 권력도 이 사회에서는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와의 거리를 너무나 쉽게 좁힐 수 있다고, 누군가를 내가 다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과연 누군가를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친금감이나 애정의 표현은 좋은 감정이라고 해서 경계심을 늦추는 경우도 많고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많아서 그 문제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곤 한다. 과거 진냥이 인권오름 글 “[진냥의 인권이야기] 내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에서 지적했듯이, 자신의 불안과 염려, 일방적인 마음 씀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불운한 경우에는 이런 ‘사랑’이 나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잘못된 자신감의 원천이 되거나, ‘너희를 위한 일’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종사자들의 노동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헌신과 봉사로 지탱되기를 기대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간혹 내가 오래도록 청소년운동을 해오고 있다는 걸 알고서는 나에게도 “청소년을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라는 치사를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청소년인권은 사랑하는데 청소년한테는 별 관심이 없다고 답하곤 한다. 글쎄, 혹시 그저 내가 그들과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서 이해를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관련 직업 종사자 분들을 만나면 과연 그것이 그 ‘아이들’을 평등한 인간으로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어떤 직업이라고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의무적으로 요구받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지도 묻고 싶어진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82 호 [기사입력] 2016년 04월 27일 13: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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