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 여덟살 구역] ‘우리’가 즐겁기 위해 ‘너’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

쩡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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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남성들은 개인 혹은 인간으로 간주되지만, 여성들은 여성으로 여겨진다. 여성이나 페미니즘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자 내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억압이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 - 『페미니즘의 도전』 중

최근 『페미니즘의 도전』을 다시 읽었다. 책 속에서 정희진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여성’을 단일 범주로 묶어서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 안의 차이들을 보지 않고,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모든 사람을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을 ‘여성’ 안에 묶어두고 싶어 하는 가부장제에 힘을 싣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어떤 정치적 약자를 만들어낼 때, 타자화시키는 방식으로 거리를 둔다. 알려 하지 않고, 알고 싶어 하는 대신 어떤 고정관념 안에 그들을 가둬둔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에 그 고정관념 바깥의 모습을 뻔히 눈앞에 두고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숭배와 혐오는 동전의 양면이며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 자신들의 이미지 속에 가둬버리기. 그 안에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심, 공감하려는 시도는 들어있지 않다.

“사실, 어린 애들은 좀 그렇다. 자기 생각만 하고, 그다지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우선이고, 처지를 바꿔 생각하기보단 당장 자기감정만 우선시한다.” 뭐 요런 종류들의 생각들을 보통의 어른들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왜? 이해가 안 되니까. 우리 어른들은 얼마나 참고 사는데 저것들은 제 맘에 안 들면 울어대고, 화를 내고 어휴 피곤해 정말, 뭐 이런 마음가짐일 거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어른들이야말로 그토록 자기중심적일 수가 없다. ‘어른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지 않을 뿐이고, 관심 갖지 않을 뿐이다. 저기 있는 저 사람의 입장에 서보려 하지 않는데 이해가 될 리가 있나.

세상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 거라고 이야기하듯 ‘애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과 어떤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한 사람 안에도 이런 태도 저런 태도,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이 다 들어있다. ‘어른’들이 그렇듯이.

비행기와 관제탑

비행기와 관제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인권교육에서 진행하는 걸 보고 재밌다 싶어 종종 응용하는 프로그램인데, 방법은 간단하다.

1. 마스킹 테이프로 바닥에 직사각형의 활주로를 그리고, 비어있는 입구와 출구를 만든다.
2. 2명이 한 팀이 되어 한 사람은 비행기, 한 사람은 관제탑이 된다.
3. 비행기는 눈을 가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활주로 안에 장애물을 배치한다.
4. 관제탑은 말로 입구에 선 비행기가 장애물에 부딪히거나 활주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출구까지 인도한다.




보통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다양한 상황이 연출된다. 눈을 가린 비행기가 활주로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모습을 보며 관제탑의 기막힌 설명에 감탄하기도 하고, 다급함에 화를 내는 관제탑과 곤경에 빠진 비행기를 보게 되기도 한다. 모든 움직임을 관제탑에 맡긴 비행기의 입장에서 나쁜 관제탑은 뭘까. ‘조금만 움직여’라는 식의 주관적인 설명은 비행기의 입장에서 그 조금이 얼마큼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답답함이 배어나는 목소리 역시 앞이 보이지 않는 비행기를 주눅 들게 한다. 출구 앞에서 비행기를 마주 보며 오른쪽 왼쪽을 헷갈리며 설명하는 관제탑 역시 비행기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뿐이다. 이 모든 관제탑의 공통점은 ‘관제탑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사고한다는 거다.

다시 비행기 입장에서 이야기해 보자면, ‘자, 지금 네 앞에 무엇이 있고,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지나갈 거야’ 하는 식으로 내가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해준 설명이 있었다. 비행기와 같은 방향을 보며 서서 설명하는 관제탑의 설명은 내가 헷갈릴 일을 방지했다. 단순한 명령과 지시가 아닌 내가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안내.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끝까지 잘 움직일 수 있도록 비행기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관제탑도 있다.

예측불허의 관제탑들

책언니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것, 공감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하며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날, 내가 도서관 바닥에 활주로를 그려놓은 순간부터 다들 신나서 이게 뭐냐, 뭘 할 거냐, 묻기 시작했다. “훗, 비밀이다!” 웃어주고 기대감을 증폭시킨 뒤, 앞 이야기들을 나누고 함께 놀이를 시작했다. 장애물의 개수를 지정하고, 우리 그래도 양심이 있지 움직이는 게 가능한 정도로 하자는 합의를 봤다. 두 역할을 한 번씩 해보고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했던 이 프로그램은 엄마 아빠가 집에 가자고 하던 순간까지 역할을 바꿔가며 계속됐다.

나는(이 프로그램을 자주 안 해봐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상상도 못 했던 관제탑들을 볼 수 있었다. 우선 대부분 출구에 관제탑이 서 있던 것과 달리 이곳의 관제탑들은 누구도 멀찍이 떨어져 비행기를 마주 보지 않았다. (같은 방향이었지만 진심으로 오른쪽 왼쪽이 헷갈렸을 뿐이다!) 조금 놀랐다. 내가 머릿속에 떠올린 관제탑의 역할과 이들이 떠올리는 역할의 모습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훨씬 많은 관제탑은 애초에 멈춰있지 않았다. 활주로 바깥에서 비행기 옆에 선 채로 함께 움직이며 설명을 해 나갔고, 관제탑이 아닌 사람들도 신나서 함께 설명했다. 지금도 장애물 배치가 완료되자마자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며 활주로를 통과하던 관제탑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가 생각했던 기본규칙 자체가 파괴되는 기분이었다. 경쟁이나 승리의 개념으로 생각했다면 저건 반칙 아닐까, 생각했을 행동들도 이 활주로를 함께 통과해야 즐거운 놀이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날, 끝나지 않는 놀이 덕분에 하려던 이야기들을 더 못 하게 되었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늘 쟤가 너무 짜증나고, 쟤가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던 사람과 모두가 하나가 되어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이라는 게 왜 이렇게 좋았을까.

얼마 후, 다른 애들이랑 싸우고 마음이 상해서 혼자 떨어져있는 사람이 있을 때, 왜 그러냐 고 물으러 가는 나에게 한 애가 와서 내 손을 잡고 자기가 왜 그런지 안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그이는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조용히 말했다. “내가 저래 봐서 아는데 우선 좀 가만히 냅둬~” 라고 나를 단속한 뒤, 껌을 나눠 먹고 있는 애들 사이에서 껌 하나를 잽싸게 챙긴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 껌을 들고 화가 난 사람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말한다. “ㅇㅇ아, 애들이 이거 너 주래!”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화가 난 사람과 그 사람에게 화가 난 다른 사람들까지 마음을 풀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 사려 깊은 행동은 공감에서 나왔기에 가능했다. 짜증이나 대충 달래고 보자가 아닌, 저 상황에서 자신이 필요했던 행동을 한 거다. 그냥 우리가 한 학기 내내 했던 이야기는 저 이야기였다.

“감정을 잘 읽어줘야 한다.”

비행기와 관제탑도, 이 사려 깊은 행동도 우리가 이야기해서 된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분명 그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들은 애들이라 다 그런 게 아니라, 그 힘을 계속 가져나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만들면 된다. 지금 이 순간들이 이해와 공감이 가져온 즐거운 느낌을 줄 수 있었다면, 누군가를 내치기보다는 공감하고 이해하며 함께 하려 애쓰는 것들이 우리 삶에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이 전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덧붙이는 글
쩡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98 호 [기사입력] 2016년 08월 24일 4: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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