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노숙당사자모임과 함께하는 주거인권학교 ⑧] 훠이훠이 인권침해 물렀거라

힘 모아 인권문제 넘다 보니 어느새 인권지킴이로

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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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5월의 소풍을 가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는 노숙인 인권지킴이’를 하기에는 더더욱 좋은 날. 하지만 노숙인 당사자모임 아저씨들이 오늘은 많이 안 오셨다. 일 나가신 분도 있고 며칠 전 기초생활보장 수급권 급여가 나와서 회포도 푸시고 빚 갚을 곳을 찾아다니시느라 바쁘다고 하신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먼저 ‘몸풀기 맘열기’로 기분 전환. 둘러앉아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며 노끈을 던지다 보면 끈들이 만들어낸 촘촘한 얼기가 공을 튀길 수 있을 만큼 된다. 모두들 “우리는 노숙인 인권 지킴이”를 외치면서 공 튀기기 놀이를 즐겁게 했다.

오늘은 노숙인이 흔히 겪게 되는 다양한 인권침해 상황에 맞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우리는 노숙인 인권 지킴이’는 블루마블 식으로 팀을 나눠 진행된다. 빨간 말과 녹색 말 두 패로 나눠 팀의 이름을 붙였다. 빨간 말은 홍익인간, 녹색 말은 녹두장군.

위 사진:칸칸마다 인권침해 상황이 놓여져 있는 말판. 이 많은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까?


“왜 옷차림만 보고 검문하나”

던져진 주사위에 나온 숫자만큼 말을 옮기는데, [지하철역을 지나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상황 칸에는 두 팀 모두가 걸렸다. 두 팀 모두 항의카드를 사용하겠단다. 녹두장군 팀의 한 아저씨는 “주민등록증을 일부러 경찰에게 안 보여주고 골탕 먹인 적 있다”는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경찰서에 가고 나서나 짐을 다 뒤져서야 신분증이 나오면 “경찰을 고생하게 한 거니까 고소함을 느꼈다”고 한다. 기분 나쁜 부당한 불심검문에 항의하는 간접적인 방법이었다. 홍익인간 팀의 다른 아저씨는 좀더 적극적인 항의 경험담을 소개했다. “왜 노숙인이 주로 입는 배급 잠바만 보면 검문하고 그러느냐고 화를 내면 경찰이 꼬리를 내린다”고 한다. “양복 입은 사람들 중에도 도둑놈이 많은데 왜 옷차림만으로 불심검문을 받아야 하냐”며 좀더 적극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신다.

위 사진:각 상황마다 다양한 대응카드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아저씨들이 이제껏 경찰의 불법 검문에 항의해본 경험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저씨들도 아저씨들만의 방법으로 항의를 해왔구나…. 경찰이 절차에 따라 불심검문을 하더라도 원하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려도 아저씨들은 손을 내 저으신다.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로서 억눌려 살아온 경험 때문인지 “현실상황을 생각하면 거부하기 힘들다”고 말씀하셔서 참 씁쓸했다.


“고용차별 못하게 해야 해”

잔뜩 뒤쳐진 홍익인간 팀은 녹두장군 팀을 따라잡기 위해 [행색이 노숙인 같다고 일자리를 안 준다네] 상황칸에서 권리카드를 선택했다. 권리카드를 써서 성공하면 다음번에 두 칸을 더 갈 수 있다. 가장 적극적인 대응방법을 사용한 거니까. 아저씨 중 한 명이 “고용안정센터에 고용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하자”고 제안했다. “노숙인 행색이라고 해서 고용에 차별을 두는 기업에게 벌금을 물리고 영업정지를 시켜서 기업은 물론 사회 전체가 노숙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각성하게 만들자”는 주장도 이어졌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준비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안’의 내용과 아저씨들의 주장이 너무나 닮은꼴이어서 놀라웠다. 지금까지 노숙인이라고 얼마나 차별을 받아오셨는지, 커다란 멍에가 얼마나 가슴 속 깊이 박혀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문득 아저씨들의 바람처럼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진다 해도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바뀌지 않는다면 법이 제구실을 못할 텐데 걱정스럽기도 했다.


“일부러 안 갚는 사람, 못 갚는 사람 구별해야”

앞서가던 녹두장군 팀이 [뒤로 두 칸]에 여러 번 걸리면서 주춤한 틈을 타 홍익인간 팀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응원 한번 해 볼까요] 칸에서 ”노숙인 인권 우리가 지키자“를 마음 모아 외친 홍익인간 팀은 다음 상황인 [빚 때문에 독촉에 시달려] 칸에서 권리카드를 사용했다. ”일부러 안 갚는 사람과 못 갚는 사람을 구별해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저소득층의 신용불량 원인이 대개 고액의 병원비와, 교육비, 기초생활비 때문인 점을 감안하면, 투기나 낭비로 인해 지게 된 빚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아저씨들의 주장이 매우 설득력있게 들렸다. ”카드사는 가만히 앉아서 이자로 돈을 버는 거니까 빌려준 돈 못 받는 위험을 감수하고 기업 활동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자 총액을 제한해야 한다” 등등 다양한 의견이 팀을 가르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원래 놀이규칙상 한 팀이 정책을 주장하면 다른 팀이 반박해서 토론이 이루어지고 상대팀이 앞서가는 걸 막기도 해야 하는데, 아저씨들은 어느새 경기규칙을 넘어 한마음으로 바뀌어야 할 내용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위 사진:홍익인간 팀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지혜를 모으고 있다.


실제 얼마 전 파산신청을 하고 법원의 면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한 아저씨는 “파산신청 전까지 빚 독촉과 사회적 낙인, 두려움 때문에 너무 괴로웠다”고 했다. 게임 내내 웃으시며 말씀하시다가 잠깐 얼굴에 슬픔이 비쳤다. 그러더니 “파산한 사실이 기록에 남으면 나중에 일자리 구할 때 차별 받을까 두렵다”라고 말을 이었다. 파산신청에 대한 홍보가 부족하고, 안 좋은 이미지 때문에 신청을 결심하기도 어려운데 신청한 후에도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신용정보법’을 좀더 강화해서 정보가 새는 일을 실질적으로 막을 수 있어야겠다.


“부양의무자 범위는 왜 그리 넓나”

[부양의무자가 있어 기초생활보장 수급권 자격이 안 된다구?] 칸에서는 권리카드를 사용했는데 이번에도 팀에 상관없이 토론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한 아저씨는 “실제 연락도 안하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친척 때문에 수급 자격이 없다”며 한탄하셨다. 실제로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수급권자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절반이 부양을 받지 못하고 있단다. 수급권자가 되지 못하면 의료나 주거, 교육 등 중요한 급여를 받을 수가 없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국가가 보장하기 위한 제도라는 취지에 어울리지 않게 모든 책임을 가족에게만 넘기고 있는 현실이다. “최저생계비 기준이 너무 낮고 수급권자가 받을 수 있는 돈도 그보다도 더 적다. 이 돈 갖고 어떻게 인간답게 사냐”는 의견도 나왔다. 실제 노숙인쉼터라도 들어가게 되면 생계, 주거급여를 받을 수 없게 되고, 쪽방에라도 들어가면 월세비용으로 급여의 대부분을 쓰게 되는 것이 아저씨들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용근로자도 실업급여 받는다고?”

[다음 상황에서 혼자대응] 벌칙칸에 걸렸던 홍익인간 팀이 마지막 상황칸에 이르렀다. 별 수 없이 혼자 문제를 풀 수밖에. [일을 했는데 임금을 못 받아], 이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팀원들과 상의해서 상황을 해결하다가 혼자 대응하려니 난감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저씨는 일단 정보카드를 써서 관련 정보를 진행자로부터 들은 다음, 구제카드를 써서 문제를 풀었다. 일용근로자 고용보험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아저씨들은 무척 관심을 보이셨다.

‘일용근로자 고용보험’ 제도를 이용하면 일용노동자도 실업급여를 탈 수 있다. 이 제도에서 말하는 ‘일용근로자’란 1개월 미만으로 고용되는 노동자를 말한다. 주로 건설근로자(비계공, 벽돌공, 목수, 용접공 등)와 중국집 배달원, 급식 조리원, 식당 주방보조원, 백화점 세일기간 동안 고용된 사람 등이 거기에 해당된다. 원칙적으로는 사업주가 피보험자격이 있는 사람을 신고해야 하지만, 사업주가 하지 않았더라도 노동자가 직접 신고할 수도 있다.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이직일 이전 18개월 동안 일한 날이 180일 이상이 돼야 하고, 수급자격을 신청하는 날 이전 1개월간 일한 날이 10일이 넘지 않으면 된다.

노숙인 아저씨들은 ‘노가다’ 일을 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일거리가 없다보니 일을 하고 싶어도 한 달에 채 15일도 채울 수가 없다. 이런 아저씨들에게 일용근로자 고용보험 제도는 조금이라도 기댈 수 있는 필요한 제도다. 그런데도 아저씨들 중엔 이 제도를 알고 계신 분이 거의 없었다. 2004년부터 시행되어온 제도인데도 얼마나 홍보가 부족했으면, 얼마나 실제 사업장에 적용이 되지 않았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중한 정보를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전해 드릴 수 있었으니 좋았다.


인권지킴이들 어여 손 잡았으면

앞서가던 녹두장군 팀이 좀더 흥미진진한 놀이 진행을 위해 조금씩 양보하다 보니 결국 홍익인간 팀에 따라 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주사위로 승부차기. 5명의 팀원이 모두 번갈아가며 던졌는데도 무승부. 어쩔 수 없이 팀의 에이스가 한번씩 던져 승패를 가르기로 했는데, 결국 홍익인간 팀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번 ‘노숙인 인권지킴이’ 프로그램을 통해 노숙인 아저씨들이 모르고 있었던 구체적인 권리 내용과 대응방법을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마음이 벅찼다. 몸풀기 맘열기 프로그램에서 함께 얽은 노끈으로 공을 튀길 수 있었듯이, 인권지킴이들도 늘어나서 다 같이 손잡으면 인권이 바닥에 닿지 않고 하늘로 통통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노숙인 인권지킴이>는...

노숙인이 자주 겪게 되는 인권침해상황과 관련된 여러 제도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노숙인 인권 실현을 위한 정책을 모색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두 모둠으로 나눠 누가 목적지까지 빨리 도착하는지를 겨룹니다.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대로 말을 이동하다가 상황칸을 만나면 항의카드, 구제신청카드, 권리카드 중 하나를 사용해 상황에 대응해야 다음 칸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항의를 직접 시연하는 것이 항의카드이며, 권리구제절차에 대한 문제를 푸는 것이 구제신청카드입니다. 권리카드를 사용하면 인권의 실현을 위해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제안하고 찬반토론을 거쳐 통과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인권침해상황에 적극 대응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인권오름 제 5 호 [기사입력] 2006년 05월 23일 19: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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