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의 인권이야기] 당신을 배반한 ‘남성되기’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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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남성이고 싶나요?”
“여성을 배려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질문이 ‘사람’이나 ‘인간’이 아니라 ‘남성’이라고 지칭해서일까? 그 사람은 대번에 여성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성폭력은 여성에게 잘못된 힘을 쓴, 즉 좋은 남성다움을 상실해서 발생하는 어떤 것인가요?”
“그런 셈이죠. 그렇게 살고자 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말끝에 슬쩍 짜증과 반항심이 묻어난다. 그럴 수도 있다. 폭력적인 남성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현실에서 여성이 어떤 남성을 선택해야 한다면 말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악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좋은 남성은 약자인 여성을 배려하고 보호하며 여성을 부드럽게 리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힘을 쓸 때 쓸 줄 아는, 또는 최소한 쓰지 말아야 할 곳에 쓰지 않는 남성이 ‘진정한 남자’가 된다. 그러고 보면 남성에게는 이 ‘힘(권력)’이라는 것이 언제나 전제된 무엇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그 밑에는 융단 폭격과도 같은 남성들의 분노어린 댓글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남성다움에 대한 일종의 환상에서 기인한다. 남성들이 성폭력 가해자들을 혐오하고 그들에게 분노를 퍼붓는 것은 남성다움을 훼손한 이들에 대한 혐오이자 분노에 다름 아니다. 교도소 내에서도 성폭력 범죄자들이 특히 멸시 당한다는 말은, 그것이 특히 나쁜 범죄라기보다 그것이 남성성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폭력 가해자가 ‘좋은’ 남성성을 회복한다면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나는 이것이야말로 성폭력에 대한 심각한 오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태어나기 무섭게 ‘여성되기’와 ‘남성되기’의 과정을 겪는다. (아니 심지어는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의 아이가 남아인지 여아인지부터 궁금해 성감별을 시도하는 걸 보면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라고 해야 할까.) ‘여성되기’의 과정에는 몸가짐은 언제나 단정하게, 다리는 오므리고 앉고, 밤늦게 다녀서는 안 되며 성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거나 모르면 모를수록 좋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반면 ‘남성되기’에는 모름지기 남자는 큰 물에서 놀아야 하고 힘을 길러야 하며, 성은 필요악이라 원래 다 그렇게 아는 것이며, 여성을 리드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정반대 성향의 ‘여성되기’와 ‘남성되기’의 훈육과정은 때로는 찰떡궁합 짝패인 것처럼 보인다. 남성과 여성 스스로 이 과정들을 내면화하면서 동시에 상대 이성이 본인과 다른 면모를 갖추고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듯한 기대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일어나는 파열음 중의 하나가 바로 성폭력이다.

성폭력은 남성들의 ‘남성되기’, 여성들의 ‘여성되기’의 그 과정 자체에 내재해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성되기’와 ‘여성되기’를 통해 획득한 남성성과 여성성은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를 수반한다. 이러한 관계는 상호 수평적인 소통관계를 불가능하게 한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발현할 수 있도록 길러진 남성과 달리 성적 욕망을 억제하도록 길들여진 여성은 그런(!) 남성을 스스로 배려해야 하거나 남성이 배려해주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긴장이 끊어지는 순간, 성폭력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배려해주기’는 철저히 남성 선택의 몫이며 이는 남성 권력을 상징한다. 남성 권력은 폭력을 통해서만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배려와 보호’의 구도 속에서도 유지된다. 배려와 폭력의 간극은 매우 먼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상호 돌변할 수 있는 권력의 두 얼굴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성이 하나의 성을 지배·통제해온 성별 권력 관계의 역전을 상상하지 않고는 성폭력에 대한 해법은 요원하다.

처음에 언급한 대화는 성폭력 가해자 교육을 하는 중에 주고받은 이른바 ‘가해자’와의 대화이다. 그리고 그 남성은 그야말로 ‘남성되기’의 과정을 충실히 이행해온 사람이다. 자신을 한번도 나쁜 남성, 즉 성폭력 가해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 우리 일상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남성 말이다. 그날 있었던 일 또한 자신이 늘 그러해왔듯 여성의 싫다는, 또는 소극적 반응에 대해 남성이 리드해야 할 몫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가해자가 된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고 혼란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어찌되었건 그 일을 남자답게(!) 떳떳이 인정한 자신을 향해 ‘당신의 남성성’을 문제 삼는 교육자의 제안은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내 인생에 예외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라고, 여성이 원하는 진정한 배려의 내용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항변하고픈 그 남성에게 당신의 ‘남성되기’ 과정을 성찰하라는 주문은 자신이 살아온 길을 부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이 그토록 믿었던 남성성이 어떻게 자신을 배반했는지, 삶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이면에 대해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것이 ‘당신의 삶이 당신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교육 네 번째 되는 날, 그 사람에게 물었다.

“성폭력을 했던 것이 당신 인생의 무엇을 바꾸어 놓았나요?”
“가벼운 일상을 더 이상 가볍지 않게 만들었어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음…… 예를 들면, 저희 조카가 여자애인데, 학교에서 남자애들을 다 이기고 오거든요. 때리기도 많이 하고. 그때는 ‘기집애가 남자들을 때리고 다니면 되겠어? 남자들이 여자니까 너 봐주는 거지’라고 말을 했는데, 사실은 애들 때리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거든요. 얼굴에 상처 나도 ‘기집애가 얼굴에 흉지면 어떡해’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 조카에게 ‘여성되기’를 교육하신 거네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말 함부로 못할 것 같아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일상은 그리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 일상의 축은 ‘단 일센치’도 이동시킬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신’의 무거움이 변화를 위한 고뇌의 무거움이라고 해석해본다.
덧붙이는 글
◎ 자주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76 호 [기사입력] 2007년 10월 24일 16: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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