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연대를 훼손하는 노예제는 살아있다

[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⑤] 제4조 노예나 예속상태 금지 (1)

류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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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 제4조

어느 누구도 노예나 예속상태에 놓이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 및 노예 매매는 금지된다.

‘노예근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자유롭고 평등한 동료 인간을 ‘노예’로 삼은 자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노예근성’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탓을 하는데 엉뚱한 쪽에 대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노예나 예속상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일찌감치 국제법의 주제가 됐다. 즉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유엔)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국제규범으로 노예제를 금지했다. 하지만 ‘금지’에도 불구하고, 또한 ‘요새 노예가 어디 있어?’라는 반응이 부끄럽게도 노예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지던 60년 전에도 노예제는 살아있었고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있다.

오늘날 노예제 형태로 분류되는 현상에는 채무노동, 트래피킹, 가사노동과 이주노동에 대한 착취, 강제노동, 노예혼 등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인종분리차별정책)와 식민주의의 발현도 노예제와 비슷한 관행으로 분류돼왔다.

제4조의 배경

‘노예무역의 보편적 폐지에 관한 비엔나 회의 선언과 최종 협약(1815년)’, ‘베로나(Verona) 선언(1822년)’ 등이 일찌감치 원칙을 정했다. 즉 노예무역은 정의와 인간성에 모순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국가들에게 노예무역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즉각적인 노예제의 금지’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이들 규정의 힘은 약했다. 구체적인 시한과 강행수단이 없기도 했거니와 노예와 식민지를 거느린 국가의 시민들이 가진 자기 이익, 습관, 편견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유럽 및 미국 등지에서 최초로 식민지의 노예제를 폐지한 영국의 노예제폐지법(1833년)을 선두로 프랑스 (1848년), 포르투갈(1858년), 네덜란드(1863년), 미국 (1865년) 등이 꼬리를 물었지만 아프리카의 노예시장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1926년 국제연맹은 ‘노예제 조약’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노예제에 대한 국제적 정의를 담았다. 조약에 따르면, ‘노예’란 소유권 행사에 부속되는 권한의 일부 또는 전부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지위 또는 상황이다. ‘노예무역’이란 강제로 노예로 만들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포획·취득·처분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행위로서 일반적으로 노예를 거래하거나 운송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1930년 ILO 강제노동협약(제 29호)은 ‘강제노동’에 대하여 ‘처벌의 협박 하에 사람에게서 뽑아내는 그리고 그 사람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은 모든 노동 또는 서비스’라 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제 4조는 긴 세월에 걸친 노예제 반대의 원칙을 선언에서 재차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의 일치였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강제 노동’을 노예나 예속상태의 새롭게 떠오르는 형태로 여겼다. 따라서 분명한 명시적 언급이 없어도 ‘강제노동’과 관련된 제도와 관행들은 4조에 의해 금지된다고 볼 수 있다.

노예제의 폐해

노예제의 폐해는 두말할 것 없이 심각한 인권침해에 있다. 대표적인 사례인 아메리카의 흑인 노예제를 생각해보자. 노예로 이익을 보려던 자들은 노예 포획을 쉽게 하려고 아프리카인끼리 전쟁을 부추겼다. 외국으로 보내진 노예의 3/4이 전쟁으로 인한 포로였다고 한다. “인간이 아프리카의 동전”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서로를 팔도록 부추겼다. 노예무역으로 인한 수입품은 아프리카의 산업을 약화시켰고, 지배계급은 노예 공급을 통해 부와 권력을 얻고, 연안의 지배자들은 내륙을 약탈했다.

이를 통해 약 1천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식민지의 이주노동에 기초한 대농장)으로 강제 이동됐다. 끔찍한 항해 도중 10명 중 1명 이상이 죽었고, 플랜테이션에서의 사망자 수는 그보다 더했다. 죽도록 일을 시키다가 죽으면 대체 인력을 새로 사는 것을 수지맞는 일로 여겼다고 한다. 노예 농장주에게는 이상적인 노예 훈련법 5단계란 것이 있었다. ‘엄격한 체벌, 열등성에 대한 감각, 주인이 가진 우월한 권력에 대한 믿음, 주인의 기준을 받아들이기, 자신의 무력함과 의존성을 뼛속깊이 느끼기’가 그것이었다.

흑인노예는 니그로법에 의해 다스려졌는데, 법의 눈으로 볼 때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가축이었다. 모계를 통한 노예 신분 승계, 인종 간 성관계 금지, 배심원 없는 특별법정의 재판, 끔찍한 처벌(낙인, 교수형, 팔다리 절단, 거세 등) 등이 그 내용이었으며 주인의 형벌에 의한 노예 사망은 살인이 성립되지 않는다고까지 했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정당화 하는 데는 시기별로 성서, 그리스·로마의 전통, 과학으로 위장한 인종주의 이론 등이 동원됐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혹독한 조건에 놓인 자유노동자보다 주인이 보살펴주는 노예의 형편이 더 낫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었다. 어떤 정당화 이론(?)이든지 그 속내는 노예를 ‘인간’으로 보지 않음으로써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속편해지자는 것이었다.

공감과 연대의 훼손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어느 한편에게만 일방적으로 피해이고 이익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나 노예노동은 자유민 노동력의 가난을 의미한다. 옛 노예 주인에게나 현대의 산업자본가에게나 노예제의 골격이 되는 인종차별은 노동자간의 단결과 연대를 막는 중요한 무기다. 지배하고 착취하는 권력은 서로의 고통과 처지를 공감하고 같이 저항해야 할 사람들을 갈라놓으려 한다. 그래서 노예 또는 노예처럼 치부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불신하고 꺼림칙하게 여기도록 하는 방법이 개발됐다. 이것이 인종·성차별 등 ‘무슨무슨 차별주의’라는 이름 붙은 것들의 역할이다.

처음에는 백인계약 노동자들과 아프리카 노예들이 저항 투쟁도 같이 했고, 빈민들도 노예들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과 동일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장벽이 강화되면서 점차 열등하다고 색칠된 쪽을 ‘내 일자리 빼앗는 놈들’, ‘파업의 파괴자’, ‘더럽고 무지한 놈들’이라 괴롭히면서 울분을 토해내는 배출구로 삼았다. 노예제의 폐해는 무엇보다도 동료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저항해야 할 상대를 잘못 보는 것, 그로 인한 공감과 연대의 훼손일 것이다.

선언 이후

국제사회는 세계인권선언 이후 노예제와 예속상태를 반대하는 원칙을 계속 새겨왔다. 대표적인 것들이 아래의 목록이다.

인신매매 금지 및 타인의 성매매 행위에 의한 착취금지에 관한 협약(1949년)
노예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성매매 착취와 인신매매가 노예제의 형태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견해를 취했다. 이 협약은 “(그 사람의 동의가 있다 할지라도) 성매매를 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획득하거나, 꾀거나, 유인하여 데리고 가는 자, 타인의 성매매를 착취하는 자”를 처벌하기로 했다.

노예제·노예무역·유사노예 제도와 관행 폐지에 관한 보충 협약(1956년)
1926년 노예제 조약이 포괄하지 못한 유사노예 제도와 관행에 초점을 두었다. 가령 채무 노예, 노예형태의 혼인, 아동과 청소년 착취를 다루고 있다.

ILO 강제노동폐지협약 제105호(1957년)
강제노동은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또는 정치교육, 차별, 노동기강, 파업에 참가한 것에 대한 처벌을 목적으로 결코 사용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유엔 시민·정치적 권리 규약 제8조(1966년)
노예상태와 예속상태를 구분했다. 규약 기초자들은 이 둘을 다른 개념으로 보고 두 개의 분리된 항(1항과 2항)으로 다뤘다. ‘노예제’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개념으로서 피해자의 사법적 인격의 파괴를 의미했고, ‘예속상태’는 보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한 사람의 타인에 대한 모든 가능한 형태의 지배를 포괄한다고 봤다.

경제사회이사회 결의안 1232(XLII) (1967년)
“아파르트헤이트와 식민주의의 인종주의 정책은 유사노예 관행을 구성한다.”

ILO 최저연령협약 제138호(1973년)
아동노동에 대한 국제적 기본기준이 됐다.

ILO 최악 형태의 아동노동협약 제182호(1999년)
노예제, 성매매, 포르노그라피, 불법 행위, 위해한 노동과 관련된 아동에 우선순위를 뒀다.

트래피킹, 특히 여성과 아동에 대한 트래피킹 방지, 억제 및 처벌에 대한 의정서(2000년)
트래피킹에 대한 정의를 확장하여 조직적 범죄 집단에게 착취 받을 때, 특히 강요의 요소와 관련되고 초국적 성격(국경을 넘는 인간의 이동)이 있을 때를 포함했다. “트래피킹이란 위협 또는 무력의 사용 또는 기타 형태의 강제, 유괴, 사기, 기만, 힘의 남용 또는 취약한 지위의 남용, 또는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자의 동의를 획득하기 위해 지불 또는 혜택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착취를 목적으로 사람을 징발, 운송, 이전, 은닉 또는 수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착취에는 성적 착취의 형태, 강제 노동 또는 서비스, 노예제 또는 유사한 관행, 농노 또는 장기의 제거가 포함된다. 여기서 말한 어떠한 착취적인 수단이든지 이용됐다면 그에 대한 피해자의 동의와는 무관하게 트래피킹으로 보고 처벌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http://khrrc.org) 연구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103 호 [기사입력] 2008년 05월 14일 1: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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