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난 겨우 여섯 살의 작은 여자아이였지요”

[시설 밖으로, 세상을 향해] 용기를 내 시설 밖으로

김선애(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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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가 살 던 집이 시설이었던 건 아니에요. 엄마가 나에게 여섯 살이라고 알려주던 날, 엄마랑 아빠랑 공원에 갔어요. 엄마는 먹을 걸 사온다 하셨고 아빠는 잠깐 어디 다녀온다 하셨지요. 잠깐은 수십 번도 더 지났는데 엄마, 아빠는 오시지 않았어요. 울었어요. 낯선 사람의 손에 이끌려 경찰서에 가게 되었고 경찰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어느 아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이십여 년의 시설 생활이 시작됐어요.

그 곳은 참 이상한 곳이었어요. 내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내고, 이상한 옷을 입히고, 밥과 반찬을 한 그릇에 모두 섞어 줬어요. 난 뇌병변장애에 겨우 여섯 살의 작은 여자아이였는데, 매일 일을 시켰지요. 기저귀를 차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도 했어요. 그렇게 일 년을 보내고 난 뒤 다른 시설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인지능력이 있거나 장애가 너무 심하지 않은 아이들은 새로운 시설에 갈 수 있는 특혜를 얻었는데 내가 좀 나았던가 봐요.

어느 순간부터 가득 쌓이는 불만

1987년 새로운 시설로 가게 되었고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어요. 학교도 다니게 됐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엔 불만이 가득해졌어요. 사람들과 지내는 것은 그렇지 않았는데, 거기에 있는 선생님들과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좀 불만이 많았어요. 아동시설이어서 성인이 되면 더 이상 그 시설에 머무를 수도 없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안 된다, 하지마라, 밥 먹을 시간이다, 잘 시간이다, 일어나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자유가 없었어요. 답답하죠. 숨이 막혔어요. 감옥이었죠.

여자는 조신해야 한댔어요. 여름엔 민소매 옷도 입으면 안 되고, 치마도 싫어했지요. 외출할 때 여자들은 빨리 들어와야 하고, 남자친구가 생기면 무슨 일 있었느냐 어디엘 다녀왔느냐 물었어요. 여자는 함부로 몸을 굴리면 안 된다는 말. 너무 황당했지요.

벌점도 무서웠어요. 잘못을 해서 벌점을 받게 되면 반성문, 시설에서의 노력봉사, 한 달간 외출금지를 받았어요. 그러다 벌점이 많아져 40점을 넘으면 시설에서 나가야 하지요. 강제퇴소예요. 엄마가 있는 애들은 갈 집이라도 있지만 엄마가 없는 우리는 갈 데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시설로 가야 하니까, 늘 조심해야 했고 늘 불안했어요. 그래서 반성문까지만 써봤지요. 하하.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어요. 남자들은 보내주기도 했지만 난 여자였고 가족도 없고 돈도 없었거든요. 그 곳에서 대학에 간 여자는 아무도 없었어요. “니 주제에 무슨 대학이냐?”라는 말에 대학을 포기하고 운 좋게 한 복지관에서 직업 훈련을 받을 수 있었지만 거기를 졸업하니 난 또다시 시설의 장애인이 되더군요.

가장 힘들었던 건 혼자라는 것이었어요. 나에겐 두려움과 어려움이 많았는데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어요. “난 아무 것도 못하고 수용시설에서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되는 건가?!” 그땐 정말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에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즈음엔 우리 엄마 아빠를 참 원망했더랬어요.

시설 밖, 자유를 찾아서

장애가 심하지 않은 사람은 시설에서 분리된 자립홈에서 생활하기도 했지만 그러기에 내 장애는 너무 심했나 봐요. 나도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어야지 자립을 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국립재활원에 가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혼란스러웠어요. 어떤 것이 맞는 건지. 그때 과장님이 “너는 언어장애도 있고, 장애가 심하니까 시설로 가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정말 난 시설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난 자유를 원했어요.

자립을 결심했지요. 다들 선생님들을 무서워했지만 난 용기를 내야 했어요. 선생님들과 높은 사람들에게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하고,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울고, 선생님들하고 싸우기도 했어요. 다들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지요. 안될 게 뻔한데 성격이 이상하다고요. 하하.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자립홈에서 생활하고 있는 언니에게 시설에서 먼저 전화를 했어요. 나를 받아줄 수 있겠느냐고. 나는 드디어 시설에서 나갈 수 있게 됐지요. 물론 자립홈에서 잘 생활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주일 정도 체험기간을 가져야 했지만요. 사람들이 대단하다 그랬어요. 만약 그때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냥 뛰쳐나왔으면 지금쯤 서울역에서 노숙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막상 나오긴 했는데, 시설선생님들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았어요. 시설로 다시 보낼까봐 간섭하지 말라는 말도 할 수 없었지요. 늘 불안했고, 시설에서 잠깐 오라고 하면 겁부터 났어요. 무슨 이야기 하려고 그러나. 혹 다시 시설로 보내는 건 아닌가. 그건 자립이 아니었어요.

꿈, 그리고 미래

나의 자립생활은 헤어졌던 남자친구를 다시 만나고, 그와 결혼을 약속하면서 시작되었어요. 어렵지만 나만의 일을 찾았고,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작년 겨울 결혼을 했지요. 행복해요. 3년쯤 뒤에는 아이도 낳을 거구요.

하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은,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을 위해 운동하는 일. 함께 시설에 있었던 언니는 시설 밖으로 너무도 나오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른 시설로 보내지는 언니를 보면서 제 목표를 정했지요. 언니에게 말했어요. 조금만 기다리라고, 내가 나오게 해줄 테니.

덧붙이는 글
김선애(가명) 님은 3년 전 자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글은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활동가 름달효정 님이 정리했습니다.
인권오름 제 104 호 [기사입력] 2008년 05월 20일 21: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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