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수업 = 거리 좁히기!

[발로 걷는 평화교육] 나와 세상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강똥 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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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처럼 시작했던 한 대안교육공동체에서의 ‘평화수업’은 ‘경계를넘어’ 활동가들에게 지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이들과 몇 차례 만나면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동안 정작 그 아이들은 ‘세상’과 ‘자신’의 ‘평화’를 만들어갈 힘을 얻었을까.


평화 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평화교육’이 ‘평화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교육’이라고 말한다. 「평화와 평화 강의교안」에서 고병헌, 이대훈은 ‘정보’나 ‘지식’으로 평화를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생활에서 평화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길러주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가 무엇일지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한 내가 아이들에게 ‘평화수업’을 한다? ‘평화를 위한 교육’은 어떤 것일지, 누구의 평화를 말하는 것인지, 개인의 평화는 모든 사람들의 평화와 같다고 할 수 있을지, 수많은 질문을 안고 시작한 ‘평화수업’. 아이들과의 수업은 내 안에 있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평화도 뭣도 아닌 것을 말하다

‘전쟁에 빼앗긴 평화’ 수업에서는 ‘다른 세계, 사회’에서 출발해 ‘나’와 맺는 관계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라크의 전쟁, 팔레스타인의 전쟁같은 삶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군사주의와 학교 이야기를 통해 전쟁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전쟁’을 수행하고 ‘공동의 적’을 만드는데 동원된 “이슬람=테러리스트”라는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넘어보고자 이슬람을 이해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이랜드 노동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평화수업을 마무리했는데 갈퉁의 ‘적극적 평화’ 개념을 빌리지 않더라도 개인의 평화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빼앗길 수 있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수업에서는 일방적인 강연이나 전달 방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아이들이 조금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시도해봤다. 그러나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새로운 고민들이 만들어졌다.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에 대한 방법적, 기술적 문제뿐만 아니라 ‘무엇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성찰이 반복되었다. 처음 아이들에게 수업을 소개할 때 “우리 수업은 관계맺기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삶과 타인의 삶, 그리고 사회적 삶의 관계,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체제에서의 삶이 나와 타인, 다른 지역, 국가의 이름 모르는 타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개인적이고 일상적 평화를 간절해하는 아이들의 삶에 작은 ‘틈’이 생겨서 그 사이에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껴안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평화수업’이 갖는 작은 욕심이라면 아이들과 함께 그 ‘틈’을 만들어 내는 것일 듯하다.

위 사진:이슬람 사원을 직접 찾아가본 평화수업.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평화일까?

전쟁으로 빼앗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문화, 그리고 비정규 노동자 이름으로 사는 분의 이야기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낯설고 잘 모르는 이야기로 읽혀지기 쉽다.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아이들 역시 자신에게 낯선 주제에 대해서는 말하거나 소통하는 것에 소극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보며 안타까워하면서도 ‘저기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조차 처음 듣는 내용이 수업에 포함되면 그저 듣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반면 아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학교 이야기, 그 속의 선생님과 친구들과 관계된 주제에 대해서는 시간이 모자랄 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렇다면 ‘낯선 주제’를 말하기보다 ‘익숙한 주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아이들이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있는 내용에 대해서만 말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됐다. 그러나 문제는 ‘낯선 주제’를 선택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주제들에 대해 아이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하는 것, 아이들이 ‘가깝게’ 느끼게 만들어 그것에 대해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평화’ 수업의 시작이라는 것.

팔레스타인 수업 후 아이들과 ‘마을신문 만들기’를 했다. 아이들이 ‘칼릴리야’와 ‘가자’ 사람들이 되어 마을신문을 만드는 것. 몇 명이 죽었다거나, 어떤 피해가 있었다는 식으로 접하는 전쟁·분쟁 지역의 기사들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그 사람들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려고 했다. 아이들이 과연 진지하게 신문을 만들지 내심 걱정하며 지켜보았다. 시간도 부족했고 공동 작업을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라 내용을 결정하고 역할을 나누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신문 작업이 거의 다 끝나갈 때 ‘칼릴리야 마을신문’을 만들던 친구 중 한 명이 “우리, 만든 사람들 이름도 넣자”라는 말을 꺼냈다. 그때 다른 한 친구가 “이름 넣었다가 이스라엘에서 잡으러 오거나 위협하면 어떡해?”라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벌써 팔레스타인의 칼릴리야 마을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물론 ‘칼릴리야’ 마을 사람이 되어버린 그 아이의 태도는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연민과 슬픔으로 느끼는 ‘감수성’만으로는 개인이 매일매일 경험하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 타인의 고통을 정확하게 바라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평화’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감성과 이성, 그리고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평화수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위 사진:팔레스타인의 마을 사람들이 되어 만들어본 신문.

수업을 준비하며 갈등했던 ‘나에서 세상으로’냐 ‘세상을 통해 나를’이냐는 출발점에 대한 이분법적 고민은 수업이 끝나갈 때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개인, 소수의 경험을 소외시킨다. 장애를 가진 ‘나’, 머리에 염색을 하고 싶은 ‘나’, 공상소설만 쓰고 싶은 ‘나’, 그리고 성적 주체성을 선택할 수 있는 ‘나’ 등 수많은 아이들의 감수성과 경험은 현실에서 소외된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출발보다는 ‘누구’와 ‘어떤’ 평화를 이야기할 것이냐에 따른 고민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연결시켜낼 것인지, 아이들이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게 할 것인지가 된다.

한 학교와의 수업에서 ‘평화’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물었을 때 한 아이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어려운데…”라고 말했다. ‘평화’라는 주제는 아이들의 교육 속에 여전히 추상적이고 다가갈 수 없는 거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한 부지런한 걸음, ‘발로 걷는 평화교육’에 대한 고민은 또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강똥 의영 님은 ‘경계를 넘어’(http://ifis.or.kr) 활동가입니다. 강아지똥을 줄여 ‘강똥’이라고 불립니다.
인권오름 제 106 호 [기사입력] 2008년 06월 03일 13: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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