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 1] ‘인간’의 권리는 ‘누구’의 권리였나

인권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을 위하여

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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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보편성? 그녀들은 어디에…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을 관통하는 정신은 바로 인권의 보편성이다. 그러나 이는 공허한 선언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실의 교훈이기도 하다. 억압과 배제, 착취에 신음하던 민중들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근대혁명 과정에서 피 흘리며 쟁취한 것이 바로 ‘인권’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남성 부르주아들은 이 혁명의 열매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낚아채 버렸다. 부르주아 남성들은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편적 인간의 권리’로 탈바꿈시키고,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권리는 보편성의 이름 아래 은폐시켰던 것이다. 이들의 권리만이 인권이라면 인권은 특권에 대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위 사진:\'보편적 인권\'은 여성의 존재를 은폐해왔다. <사진 출처: UN Photo>
인권의 보편성은 인권의 역사를 관통하는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이다. 소유를 기반으로 한 계급적 차이가 인권의 보편성을 한낱 공허한 선언에 머무르게 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어 온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계급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인권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점은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의 도전으로 비중있게 다루어져 온 반면, 여성과 아동 등 소수자들의 권리가 배제와 침묵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다는 문제의식은 아직도 ‘보편화’되지 못하고 있다. 인권의 보편성은 사회적 약자에게 보장될 때 비로소 인권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주장은 보편성의 재구성이 시급하다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특히 여성주의는 남성 중심주의에 배제되고 은폐되어진 모든 영역의 문제들을 들추어내고 정치화시키는 데 성과를 거두었다. 여성주의적 관점은 기존의 보편적 인권 담론의 한계를 분석하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과 실천의 영역을 열어주고 있는 것.


‘누구’의 권리가 살아남았나

여성주의는 근대 자유주의 인권 개념이 남성중심주의적, 여성차별적으로 구성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서구 근대 자유주의 인권은 보편적인 개인의 권리라는 관념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이 ‘보편적 개인’은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구성되었고, 필연적으로 ‘보편적 개인’에 들어가지 못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개인의 권리는 단지 남성 부르주아들로 대표되는 시민, 가족을 대표한 남성 가장들의 권리일 뿐이었다. 이러한 개인의 권리 관념에서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권력질서, 경험의 차이, 정체성의 차이 등은 뭉뚱그려지고 가려진다. 다양한 인권 주체들은 연병장에 늘어선 똑같은 군인들처럼 균질화되고 만다. 거기서 살아남는 것은 남성 부르주아들의 권리이다.

이러한 인권의 편향성은 국제인권규범에 공고히 자리 잡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1조의 ‘형제애’라는 표현, 사회권 규약 7조와 10조의 ‘가족임금체계’와 ‘가족을 이룰 권리’, 여성에 대한 폭력을 중대한 인권문제로 고려하지 않은 여성차별철폐협약 등은 남성중심적 인권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지적받아왔다. 가사노동과 보살핌 노동은 노동으로서 정당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다. 최근 고문의 개념을 아내 강간까지도 포괄하려는 국제법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가족 안에서 자행되는 아내와 자녀에 대한 가장의 폭력과 아내 강간 문제는 ‘고문’에 비해 중대한 인권문제로 취급받지 못한다.

실질적 인권구제 활동에서도 남성중심주의는 뿌리깊게 작용하고 있다. 무력분쟁 과정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은 ‘집단학살’, ‘종족말살’이라는 이름 아래 독자적 자리를 갖지 못하거나 중대하고 조직적인 인권침해로서 인정받지 못한 채 주변화되곤 한다. 한 예로, 르완다 학살을 다룬 ‘UN 사실 조사단’은 집단학살이 자행된 지 9달 후 전례 없이 많은 수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 시작할 때까지도 여성에게 조직적인 성폭력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여성주의자들은 지적한다.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들은 근대 자유주의 인권관이 대표하고 있는 남성 부르주아와 동일한 ‘입장’에 설 수 없다. 계급과 인종, 성정체성, 자본주의세계질서에서의 위치 등에 따른 경험의 차이는 기존의 인권개념으로는 보장될 수 없는 권리의 질서를 요구한다. 이는 기존의 남성 권리에 여성의 권리를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여성 차별에 대한 대안을 기회의 평등에서만 찾는 것은 그래서 비판받게 된다. 이미 구조화된 차별을 간과한 채 여성에게 동일한 기회를 준다 해도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기회에 접근할 수 없는 여성에게 평등은 헛된 공약과도 같다. 기존의 인권 질서, 구조를 뒤집어 새로운 권리 질서를 만들어 낼 때 인권의 보편성은 그야말로 인권의 출발이자 끝으로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인권규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가부장적 구조로써 세계인권선언의 ‘형제애’라는 표현은 줄곧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결코 ‘자매애’를 추가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가부장적 사고에 기반한 형제애나 그에 대등하는 자매애가 아니라 인류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연대’와 ‘신뢰’ ‘우정’ 등 새로운 질서의 구성이 요청된다.


차이 드러낼 때 연대의 공간도 열려

위 사진: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드러낼 때 연대도 가능하다. <사진 출처: UN Photo>
또 다른 질서의 문제는 남성/여성이라는 단일한 차이만이 아니다. 여성 사이에도 다양한 차이가 존재한다. 계급적 차이 아니라, 성정체성, 종교와 지역, 인종에 따라 무수하게 다양한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정체성의 차이는 인권 문제의 다양성으로 표출된다. 이슬람 여성과 서구 여성 사이의 차이와 긴장이 있지만 이들 역시 연대해야 할 공동의 목표가 있다. 서구 여성운동은 이슬람 여성의 억압에 대한 상징으로 ‘히잡’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슬람 여성 중에는 ‘히잡’은 오히려 비서구화된 민족문화라고 맞서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두 여성 집단 모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처럼 남성 지배 권력이 만들어내는 전쟁과 폭력, 억압에 저항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지닌다. 전쟁은 이슬람뿐 아니라 서구 여성에게도 억압과 폭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동구 여성과 제3세계의 빈곤한 여성도 마찬가지로 종횡하는 차이와 연대가 존재한다. 두 여성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상이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착취에 내몰린 공통의 현재가 있다. 레즈비언과 이성애자는 성정체성이 가져다주는 긴장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억압에 대한 도전이 연대의 공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정체성의 차이가 씨줄처럼 인권문제를 펼쳐놓고 있다면 인권 억압은 날줄로 인권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당면한 인권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인권의 질서에 도전하기 위해 여성들은 무수한 지점에서 연대하게 된다. 보편성이 재구성되는 지점은 바로 모순과 모순 억압과 억압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만나 연대를 포착하는 것이다. 예컨대 ‘가족임금체계’, ‘가족을 이룰 권리’ 등 지적되고 있는 여성 차별적 인권규범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은 가족을 뛰어넘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대안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성소수자, 비혼주의 등 여성 내에서의 다양한 차이를 인권규범이 또다시 차별하지 않도록 말이다.

위 사진:이 여성어린이들의 현실은 계급, 성, 인종의 억압을 함께 드러낸다. <사진 출처: www.un.org/waterforlifedecade>
또한 지구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는 체제에 대한 여성주의적 인식도 보편성의 재구성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 체제를 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적으로 인종화된 가부장제’로 개념화한 여성주의자 질라 아젠슈타인의 분석은 유효하다.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자유무역협정으로 대표되는 ‘무장한 세계화’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 억압과 폭력을 재생산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국제인권규범은 단지 정부 책임뿐 아니라 여성들의 삶을 더더욱 옥죄고 있는 ‘사적영역’의 행위자들인 IMF 등 국제경제기구, 다국적기업, 그리고 자유무역협정과 같은 국가간 협정까지도 규제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여성주의에 입각해 억압과 배제, 착취를 양산하는 구조를 뒤엎는 보편성의 재구성 기획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은폐된 공간을 인권의 영역으로

위 사진:레소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성할례의식. <사진 출처: UN Photo>
인권에 있어 여성주의의 또 다른 공헌은 이른바 ‘사적 영역’의 억압을 정치화했다는 점이다. 여성주의가 가부장적 지배를 은폐시키기 위해 공사영역을 인위적으로 구분했다는 비판과 함께 사적영역에서 신음하고 있던 여성문제에 인권 개념을 적용한 것은 보편성의 재구성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부장적 질서가 통제하는 가정을 사적 공간으로 구분 짓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구조적인 폭력을 모두 “집안 문제”로 치부해 왔는데 여기에는 남편/아내뿐 아니라 부모/자녀의 위계도 포함된다. 일터와 집을 상호배타적이며 위계적 공간으로 나뉘는 전략은 서구 근대 자유주의적 인권관에 내재해 있는 지배 질서이다. ‘여성이 있어야 할 공간’, ‘아동이 있어야 할 공간’ 등 소수자의 공간을 설정하고 그 곳은 ‘사회’가 아니라고, 인권의 영역이 아니라고 구분짓는 전략이다. 그 안에서의 인간에 대한 억압은 인권침해로 호명되지 않으며 문제의 해결은 그 공간의 권력자에게 맡겨져 있다. 가정뿐 아니라 학교, 복지시설 역시 그런 인권개념의 배제 속에 방치된 공간들이다.

국제법 학자 힐러리 찰스워스는 고문에 대한 국제적 정의가 ‘공무원’이 개입되었을 때를 요건으로 하고, 노동권 보장 역시 공적 노동시장에 한정되는 것을 비판한다. 가정을 비롯해 사적 관계에서 자행되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 역시 고문의 한 유형일 수 있으며, 가사노동과 보살핌 노동은 이른바 사적 영역의 대표적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정치공간에서만 명명되는 의문사도 여성과 소수자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적영역’에서의 의문의 죽음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인권운동이 걸어온 길을 반성하자

여성주의적 인권의 재구성을 위한 발걸음은 인권운동이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인권운동에서조차 여성의 인권이 비가시화되고 경청되지 못해온 것은 사실이다. 감옥 인권운동이 갇힌 자들의 인권을 주장할 때 여성 재소자의 경험은 어디에 위치에 있었나? 여성재소자가 남성재소자에 비해 소수이고 그녀들의 존재가 가시화되기 힘든 조건인 것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감옥이라는 공권력의 억압이 구조화된 곳에서 여성이 겪는 이중 삼중의 고통과 차별은 감옥인권운동에서 제대로 의제화되지 못했다. 경찰폭력을 감시하는 현장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성차별적 폭력 역시 주변화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학생인권’에서도 학교 안의 소수자들의 경험은 아직도 본격적인 의제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위 사진:파괴된 집과 여성들. 평화와 안전 개념은 여성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사진 출처: UN Photo>
인권의 보편성은 이제 계급의 차이뿐 아니라 여성 등 모든 소수자들이 가진 정체성과 억압의 차이를 반영하여 재구성할 때에만 비로소 허구가 아닐 수 있다. 지난 5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가 한국정부에 대해 아내강간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입법적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인권과 평화, 안전, 자기결정 등에 관련된 국제인권규범과 인권운동의 실천을 여성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더 이상 유보시킬 수 없는 과제이다.
인권오름 제 9 호 [기사입력] 2006년 06월 21일 4: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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