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의 인권이야기] 나는 올림픽을 보지 않는다

외면하거나 혹은 적당히 구획지어 즐기지 못하는 변명

양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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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림픽을 보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금을 몇 개를 땄는지, 어떤 선수가 어떤 기록을 세웠는지, 금메달을 따면 준다는 아파트나 보상금 따위도 관심 밖이다. 아니다. 사실 올림픽에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불편함을 비켜가고자 하는 관심이 있다. 우연히 올림픽과 관련한 소식이 나오면 채널을 재빨리 바꾸거나 아예 텔레비전을 꺼 버리는 정도의 관심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모든 국제 경기는 물론 프로 스포츠와 담을 쌓고 지낸다.

캐나다에 한 달간 여행을 다녀온 친구를 만났다. 동계올림픽을 치루기 위해 캐나다의 원주민(원주민이란 말이 싫은데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들이 게토화 된 곳에서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들었다. 죽거나 방치되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특히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거리 노숙자들은 새벽2시~7시까지만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되냐고? 잡혀가게 된단다. 거리에서 잠을 자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이유라고 한다. 해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지만 경찰은 관심이 없고, 올림픽 때문에 거주지에서 밀려나거나 그나마 단속이 더 심해져 벤쿠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해 있다고 한다.

심각한 것은 주민들의 반발과 분노에 대해 캐나다 정부와 사회는 관심조차 없다. 시위 중 물건을 부수는 일이 발생해도 언론에는 한줄 기사로도 보도되지 않는다. 오히려 간혹 있는 평화적으로 끝난 시위에 대해서만 보도가 된다. 참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치워버리고 싶을 때는 언제든 치워두고, 착한 척, 세련된 척하려는 기만에 어이가 없다! 마침 친구가 지나가는 길에서 군중들의 시위가 있어 함께 참여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분노하던 나는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상계동올림픽’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철거민들이 겪은 고통을 알게 되었던 후, 다시는 국제 스포츠 경기와 프로 스포츠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빛나고 화려한 것에 끌려 있는 동안 버려지고, 방치되고, 치워져버리는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와 더불어 타인의 성공한 인생에 열광하는 광기어린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환멸로 이어진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께는 양해를 구한다.)

올림픽 등 각종 국제 경기나 프로 스포츠에 대한 나의 생각을 모두가 같이 느껴야 한다거나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거나,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외면하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혹은 알면서도 무시 한다는 것은 얼마나, 혹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마음속을 구획지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뛰어난 선수에 대한 순수한 응원이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스포츠 자본에 대한 거부감이니까 구별하고,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혹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좋은 것일까?

이런 이야기를 깨내면 나에겐 어김없이 설명해야 할 의무와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 만큼의 절충점을 제시할 과제가 주어진다. 불편한 사람은 자신의 불편함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와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하는 불합리가 남게 된다. 이 경우도 불편한 사람(불편함을 말한 사람은 그 자신이 불편한 존재가 된다)이 무시되지 않는 경우에나 그렇다. 나는 불편한 사람이 되어 방치되거나 치워진다.

뭐,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식으로 불편한 존재들을 치우게 되면 얼마나 남을까? 하는 궁금증은 생긴다. 하긴, 여기는 ‘대한민국’이니 나 같은 사람이 적어서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 헉! 혹시, 이런 생각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내가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말이다. 음... -,.-;;

덧붙이는 글
양미(빨간거북) 님은 서부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193 호 [기사입력] 2010년 03월 09일 23: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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