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 공룡트림] 어린이 ‘공포정치’를 고발함 - 그림책 속 어린이 vs 어른

이선주
print
편집자 주: [어린이책 공룡트림]은 인권의 감수성으로 동화를 읽는 꼭지입니다.


공포정치의 사전적 정의는 “정권을 유지 획득하기 위하여 대중에게 공포감을 주는 정치”이다. 정권을 어른으로 대중을 어린이(혹은 청소년)로 살짝 비틀어 대입시켜 보면 어떨까. “어른은 어른의 지위를 유지 획득하기 위하여 어린이(청소년)에게 공포감을 주는 정치”를 한다! 어쩐지 본래의 공포정치 정의보다 ‘덜’ 낯설지 않은가. 비교적 애교에 가까운 ‘망태할아버지’류의 겁주기부터, 두발과 의복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규제, 언어적 신체적 체벌, 일방적 징계 및 처벌까지. 어른이 어린이(청소년)와 관계 맺기 위해 쓰고 있는 수많은 공포정치의 전략들이 우리 주변에 일상적으로 퍼져 있다.

위 사진:어른은 ‘안전띠’라 생각하지만, 어린이에게는 통제와 압박을 요구하는 폭력일 수 있다. 보호의 이름으로 꽁꽁 묶여 삶의 엔진을 자유롭게 돌리지 못하는 어린이를 풍자 - 윌리엄 스타이그 『어른들은 왜 그래?』(비룡소, 2008)


운전대를 홀로 쥐는 어른 - 윌리엄 스타이그, 『어른들은 왜 그래?』 (1995)

못생긴 괴물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슈렉의 원작자 윌리엄 스타이그(Willaim Steig)는 1995년 작『어른들은 왜 그래?』(비룡소 2008) (원제, ‘Grown-ups get to do all driving')를 통해 어른들이 얼마나 ‘제멋대로’ 어린이들을 조정하고 통제 하려는가를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윽박지르고, 끌고 다니고, 심술부리고, 아무 때나 뽀뽀해 달라고 하고, 깨끗한 손을 검사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만 좋아하고, 키를 재어보고, 전화기를 꿰차고, 궁금한 것엔 대답도 안 해주는 어른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어른의 변덕스러운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윌리엄 스타이그가 어린이의 시각과 시점을 중력처럼 꼭 쥐고 그림을 그려나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갑자기 시점을 비틀어 어른의 위치에서 의도적으로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를 따뜻하게 봉합한다거나, '그래도,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종류의 도식성에 갇혀 있지도 않다. 왜 어른들은 모든 상황에서 “혼자서만 운전을 다 하려고”하는가의 문제의식과 어린이의 시각을 죽 밀고 나가고 있는 것이 이 책의 진짜 매력 코드다.

어린이를 통제하는 무시무시한 처벌 - 하인리히 호프만 『더벅머리 페터』 (1845)

최초의 어린이용 그림책이 약 350년 전인 1657년 『세계 최초의 그림교과서』라는 이름으로 나왔다지만, 어린이 중심의 시점을 가진 그림책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초창기 그림책의 대부분은 'mirror book'이라고 하여 어린이의 행동을 수정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18세기 후반에는『막스와 모리츠』(1865년), 『피노키오』(1883년)등의 일련의 작품에서 모험을 감행하는 악동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하나 같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어른 말 듣지 않으면 바로 이렇게 되는 거야’라고 하는 강한 경고가 담겨 있다. 피노키오는 코가 길어지고, 막스와 모리츠는 기계에 갈려 오리 먹이가 된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였던 하인리히 호프만의 1845년 작 『더벅머리 페터』(마루벌, 2007)는 나쁜 버릇 고치기류의 처벌성 강한 스토리의 시초격인 그림책인데, 출판 즉시 당시 어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게다가 영어,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 번역이 되어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31년간 100쇄를 출간했다고 하니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악동의 처절한 결말’이라고 하는 이 텍스트에 이중의 전략이 들어 있음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어린이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고 하는 선명한 말초적 이미지와 글의 리듬과 운율이 살아 있어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언급했듯이 어린이들의 ‘나쁜 행동’을 확실히 고쳐 줄 처벌적 메시지를 강하게 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이중의 전략을 통해 어린이들은 운율과 이미지를 즐기면서 작품 속에 빨려 들어가고, 결국 어린이는 강한 처벌적 메시지에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19세기~20세기의 어른들은 어린이가 자신의 행동을 즉각적으로 수정할 이 강렬한 메시지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더벅머리 페터』의 이런 강한 처벌적 메시지는 68혁명의 세례를 입으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70년에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교육적 관점을 비판하는 <<안티-더벅머리 페터>>가 출간되기도 한다.

위 사진:불장난한 아이는 불에 타서 죽어 버리고, 먹을 것을 먹지 않은 아이는 쇠꼬챙이처럼 말라서 죽어 버리고, 손가락을 빤 아이는 손가락이 잘려 엄지손가락이 없는 채로 살아간다는 이야기 - 하인리히 호프만 『더벅머리 페터』(마루벌, 2007)


그렇다고 『더벅머리 페터』가 출간 당시에 환영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림책 속 아이들이 죽거나 손가락이 잘리거나 타버리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놓지 않고 있었던 강력한 자기의지를 문제 삼은 이들도 존재했다. 진지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그림 때문에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부추겨 그 행동을 그대로 따라할지 모른다는 ‘교육적 우려’들도 존재했는가 하면, 자기 호기심과 의지를 ‘실천’하는 어린이의 행동에서 ‘혁명적 주체성’을 예감하며 이 책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림책 속에서라도 순응적이고 착한 아이가 아닌 ‘못된’아이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처벌이 아닌 내면세계의 탐험으로 - 모리스 센닥, 『괴물들이 사는 나라』 (1963)

1963년 『괴물들이 사는 나라』(시공주니어, 1994)가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 맥스의 도발적인 장난들과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라는 표현 때문에 들썩였다고 한다. 주인공 ‘맥스’의 ‘괴물딱지 같은’ 도발적 표정과 말들이 기존 사회의 어린이상을 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벅머리 패터』 이후 100년 동안 어린이에 대한 사회의 관점은 그리 크게 바뀌지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잖을까.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이야기는 맥스가 늑대 옷을 입고 마음껏 뛰어 놀다가 결국엔 방에 갇히면서 전환되기 시작한다. 『더벅머리 패터』의 문제의식에 따른다면 맥스는 그대로 갇혀 굶어 죽거나, 자신이 괴롭히던 강아지에게 밥상을 빼앗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1963년 맥스는 죽지 않았다. 자신의 작은 방을 세상 전체로 만들어 버리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나무와 숲이 생기더니 이내 거대한 바다가 생겨 자신만의 배를 타고 괴물들의 나라로 가서 마음껏 놀고 돌아온다.

문제는 ‘돌아온다’에 있다. 작은 방을 세상 전체로 만들어 마음껏 놀고자 하는 어린이의 내면을 지지한 작품이지만, 창문 밖을 뛰쳐나올 변화를 추구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너무 안전하고도 따스하게 돌아온다. 첫 장면의 초승달이 마지막 장면의 꽉 찬 보름달로 묘사된 것, 비어 있는 식탁 위에 따뜻한 밥이 기다리고 있는 것, 늑대 옷을 살짝 벗고 인간의 머리칼을 드러낸 다는 것은 맥스라는 어린이의 심리적 만족감과 성장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주고 독자인 어린이들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전달해 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엄마가 맥스를 가두어 두는 불균형한 권력관계와 어른의 권위적 지배 관계에 대한 것에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지는 못한다. 기존 질서는 변함이 없는데 어린이는 변하고 자라고 있다고 하는 ‘성장소설’의 패턴이 내포되어 있다.

위 사진:방에 갇힌 장면과 괴물 나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마지막 장면 - 모리스 샌닥 『괴물들이 사는 나라』(시공주니어, 1994)


어른의 권위주의적 지배에 대한 조롱 - 존버닝햄, 『지각대장 존』 (1987)

여기서, 『지각대장 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이기도 했던 『지각대장 존』의 작가 존버닝햄은 아방가르드적 삶을 추구했던 부모 밑에 유목하는 삶을 살았다. 10대의 한 때는 서머힐에서 자유롭고 즐거운 생활을 했다. “절대로 맞으며 공부하지 않았고 그러한 권위적인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다”는 그는 어린이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지지하고 공감하는 작품을 많이 그리고 썼다. 또한,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을 추구하는 어린이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 사이의 반목 역시 그가 풀어야 할 큰 주제 중 하나였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갇힌 작은 방에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마음껏 즐기고 자연스럽게 화해의 과정을 밟는 서사라면, 『지각대장 존』은 화해나 뜨거운 포옹 없이 직접적으로 권위를 조롱하고 나선다. 교사는 검은 학사모와 검정 가운을 입고. ‘존’이라고 하는 애칭이 아닌 ‘존 페트릭 노먼 멕헤너시’라고 철저히 객관적 존재로서 아이 이름을 부르고, 300, 400, 500번의 반성문 쓰기 처벌을 내린다. 이는 흡사 판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권위주의적인 교사 앞에서 어린이들은 영원히 ‘피고자’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화’가 아니라 ‘증언’하듯 말해야 하고,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강력한 처벌 앞에 놓인다. 결말에 이르러 교사의 위험을 모른 척 하는 통쾌한 복수로 마무리 된다. 이러한 ‘심리적 복수’의 결말은 쉽게 풀리지 않는 교사-학생, 어른-어린이간의 단절적 관계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위계적인 질서와 구조 속에서는 어떤 다른 해결의 방법이 없다. 서로 모르는 척 하는 일 밖에는…….

위 사진:존 버닝햄, 『지각대장 존』(시공주니어, 1996)


“교사가 서까래에 매달린 고릴라에게 보복을 당할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권위주의에 대해 많은 통찰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 존버닝햄”

겁을 주어 말을 듣게 한다는 ‘공포정치’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를 온존하고 싶은 의지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어린이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그렇기에 어른이 아닌 어린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자하고, 권위주의에 브레이크를 걸고자 한 몇 몇 어린이 책 작가의 시도는 값지다.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는 가족 내에서 어린이에 대한 지배를 멈추지 않으면 사회의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바꿔내지 못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단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권위주의의 체계를 몸에 익히게 되기 때문일 테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자기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운전해 보고픈 어린이라면 이 세상은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으로 가득 찬 것으로 수밖에 없다. 어린이들이 자신의 운전대를 자기가 쥐고, 멋지게 삶의 드라이브를 즐길 그 순간을 향해, 우리 모두가 함께 가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 사진:『어른들은 왜 그래?』의 마지막 장면 - 윌리엄 스타이그 『어른들은 왜 그래?』(비룡소, 2008)
덧붙이는 글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 입니다.
인권오름 제 198 호 [기사입력] 2010년 04월 14일 15:33:31
뒤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