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자의 인권이야기] 너에 대한 배려

김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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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써 몇 년 전일이다. 춘천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조카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아 다녀온 적이 있다. 파티 장소는 언니네 집에서 좀 떨어져 있는 외곽의 레스토랑이었는데, 속으로 ‘집 근처에도 괜찮은 곳이 있던데, 차까지 대절하며 왜 굳이 거기로 가자는 거지? 요즘 애들은 너무 화려한 걸 좋아해’ 하며 따라갔다. 레스토랑은 춘천 어린이 회관 안에 있는 것으로 공지천 주변 건물 주위에는 정원이며 야외공연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떡볶이, 김밥, 과자와 음료수 등으로 상을 차리고 케이크 촛불이나 끄며 집에서 조촐히 치르던 이전의 생일파티와는 다른 분위기, 훨씬 격조 있는(?) 장소에서 아이들은 그야말로 칼질을 하며 조카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그래도 선물은 아이들답게 2000원 내외의 문구류와 작은 카드였고, 조카와 아이들은 식사가 끝나자 일제히 밖으로 뛰어나가 놀다 들어왔다. 연신 땀을 흘리며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는 아이들은 생일파티를 하러 온 건지, 뛰어 놀기 위해 온 건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신나게 놀고 또 놀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순간, 생각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아! 그래서 여기서 하자고 했나?.’

조카의 생일이 있기 몇 달 전, 조카와 나는 위에서 잠시 말한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때도 토요일이었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레스토랑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인양 레스토랑 안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데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나는 마트나 백화점도 가기 꺼려하는 터라, 식사하는 장소의 소란함은 견디기 힘들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어 가게 주인을 찾아 아이들의 자제를 부탁했다. 하지만 주인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이라며 죄송하다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이들과 함께 있던 한 엄마에게 조용히 해 줄 것을 부탁했고, 지나가는 아이마다 붙잡고 주의도 주었다. 하지만 이미 한계상황을 넘어버린 아이들은 ‘이렇게 즐거운 세상이 있냐’는 듯 소리까지 빽빽 질러대며 레스토랑을 접수해버렸다.

결국 나는 즐거운 아이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불쾌한 마음으로 레스토랑을 나와야 했고, 조카에게 ‘무슨 저런 아이들이 다 있냐, 엄마들도 너무한다’며 ‘저렇게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남한테 불편을 주는 건 문제가 있다’며 투덜거렸다. 조카 역시 이모 말에 전적으로 긍정한다는 듯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이모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조카는 그때 초등학교 4학년이고, 자신 역시 어디서든 공간만 있으면 신나게 뛰어 놀며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은 나이였다. 더군다나 생일을 맞아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 놀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아이였던 것이다. 그러니 생일잔치는 신나게 하고 싶고, 친구들과도 원 없이 뛰어 놀고 싶은데,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는 실내라는 한계가 있어 남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망아지처럼 쿵쾅거리고 놀아도 문제없을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조카에게 ‘왜 그곳을 택했느냐’고 넌지시 물어보니, ‘아이들과 놀 수 있는 곳’이라서 그랬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와 지난번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의 사건을 기억해냈다. 아이구, 이런 기특한 것!

2.
아침저녁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다보면 하루에도 서너 명씩 mp3, dmb, pmp, 아이폰족들을 만날 수 있다. 간혹 외국어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음악이나 영화 감상을 위한 것이다. 록, 팝송, 가요 등 좋아하는 음악적 취향도 다르고 각종 기기도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들 위주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근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들은 지하철을 타기 전부터 내릴 때까지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자신들의 세계에 빠져있다. 이어폰이라는 게 자꾸 들으면 들을수록 청력이 약해지는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의 강도를 높이게 된다. 쿵쾅쿵쾅 자기들 흥에 취해 옆 사람을 고문하는 줄도 모른다. 아니, 자신조차 깊은 잠에 빠져서도 그 시끄러운 음악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괴로운 건 나뿐이다. 잠들지 못한, 편안히 앉지 못한, 유난히 예민한 귀를 가진 내 탓이다. 소리에 민감한 내 못난 탓이다.

3.
맑디맑은 물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아이들이 물장구치는 강남의 양재천은 아니지만 중량천의 뚝방 길도 나름대로 한강 지류의 운치를 맛볼 수 있는 장소이다. 뚝방 길에는 자전거 도로가 형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에 인라인 스케이트, 혹은 조깅, 야깅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도 너에 대한 배려는 많이 부족하다.

차선으로 말하자면 뚝방 길은 단순한 2차선으로 오고 가는 길이 한 차선씩 꾸며져 있다. 도로 폭도 그다지 넓지 않아 한 차선에 두 사람이 나란히 뛰기가 어려운 넓이이다. 그래서 누군가 뛰고 있다면 뒤에 따라오던 자전거는 조심스레 그 사람을 지나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서로에 대한 안전사고 예방은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곧 너에 대한 배려가 된다.

하지만 뚝방 길은 기본적인 질서조차 지켜지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다. 오가는 사람들이 부딪치기 일쑤이고, 도로 바깥쪽으로 몸을 쉴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음에도 많은 경우 도로 안 쪽에 발을 들여놓고 앉아 쉬는가 하면,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뒤뚱거리는 아이들을 도로에 무방비로 걷게 한다. 바로 뒤에서는 자전거며 인라인 스케이트들이 속력을 내며 달려오는데, 젊은 부모들은 천하태평 세월아 내월아 산책코스인양 걷고 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철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혼자만의 속도감이 중요한 듯, 자전거를 타면서 경적을 울려대며 마구 속력을 내는 사람들도 있다. 격렬한 운동이 하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만 이용하는 뚝방이 아니다.



내가 유난히 예민하고 까다롭기 때문일까? 사실 내 눈에는 너에 대한 배려는 없이 나에 대한 무한한 배려만이 눈에 띌 때가 많다. 지하철에서도 조금만 좁게 앉으면 한 사람 더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데도 혼자만 편하자고 넓게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왜 그러는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다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앉는 남자,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핸드폰으로 자신의 연애담, 애정관에 대해 1시간 내내 토로하는 사람 등등.

너에 대한 배려는 곧 나에 대한 배려다. 단순한 진리다. 내가 싫은 건 너도 싫은 거고, 네가 좋은 건 나도 좋은 거다. 복잡할 게 하나 없다. 일상적인 사소함, 그 안에 너에 대한 또 나에 대한 새로운 시작이 있다.
덧붙이는 글
김옥자 님은 『갈라진 시대 기쁜 소식』편집인 입니다.
인권오름 제 208 호 [기사입력] 2010년 06월 23일 21: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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