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⑥] ‘청소년 인권운동’ 첫발을 내딛다

고근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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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의 한 부분이었던 중·고등학생운동이 학생인권, 청소년 인권운동으로 전환되던 95년의 시작은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이 있었고, 그해 말 결성된 중고등학생복지회(아래 학복회)부터 본격화된다. 90년대 초중반 다른 부문운동이 자리를 잡아가던 것과는 달리 고등학생운동은 오히려 침체를 면치 못했다. 물론 이것은 학생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비롯한 학교의 탄압과 사회적 억압 등이 작용한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중에 피시(PC)통신을 통해 ‘학생인권’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며 공개적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나선 사건은 놀라움 그 자체였고, PC통신에 모인 이들은 하나둘 학생의 ‘인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2호 참고)

위 사진:최우주 씨의 헌법소원 의사 표명 이후 하이텔에 개설된 토론방에서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학복회, 인권을 말하다

최우주 씨 헌법소원 관련한 토론방이 없어지고 95년 12월경, PC통신 에 중고등학생복지회가 만들어졌고 이어 PC통신 에도 학복회가 생겨났다. 당시 학복회 활동을 한 전영민 씨(95년~96년 학복회 활동)는 학복회 이름에 대해 “처음에는 ‘학생인권회복회’라는 이름이 제안했었는데, 중고등 학생들에게 회복할 인권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머무르게 됐고, 이런 의문에서 ‘학생복지회’라고 짓게 됐다”라며, “어차피 학생들에게 회복해야 할 인권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없었던 상황이었고 인권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다지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무슨 정부조직 같다는 생각도 든다.”라며 웃는다. 학복회에서 활동한 나정훈 씨(96년~99년 학복회 활동)는 “온라인 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았다”며 “소식지 ‘돋움’을 만들어 학교 안에서 배포하거나 세미나 같은 것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세미나를 했던 것은 철학이나 인권의 사상적 배경에 접근하는 공부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세미나 내용 중에는 우리가 운동의 근거로 삼았던 유엔어린이청소년권리협약도 있었다”고 말했다.

학복회는 온라인 모임에서 시작돼, 초기에 ‘오프’ 단체로서의 활동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학생인권의 이슈를 제기한 ‘최초의 청소년인권 단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학복회는 과거 사회변혁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되던 ‘고등학생운동’이 자신의 문제에 천착한 새로운 부문운동으로 발전한 형태이다. 물론, 80년대 고등학생운동에서도 ‘강제야자’ 등의 교육개혁이나 학생자치 등의 학생인권의 이슈가 제기되었지만, 학복회는 인권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학생 인권 운동을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길을 묻는다

김한울 씨(95년~96년 학복회 활동)는 “학복회에서 이야기하는 학생인권의 문제를 많이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매체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어떤 이슈를 가지고 구체적 활동을 위해서 학복회가 모인 적은 없었다. 이점이 아쉬운 점이기도 한데, 조직사업을 하고 싶었지만 (확인할 수 있는) 회원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96년 연세대에서 있었던 대학생들의 투쟁을 보고 ‘배후’가 있어서 부러워했다고 말하는 김한울 씨는 “운동을 조직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선배가 있고 배후가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을 정도”라는 것. 학복회에 참여한 청소년들에게 모임운영이나 이슈선정, 활동방식을 찾는 것 등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고등학생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던 소모임이 90년대 중반이후 사라지거나 혹은 대부분 그 성격을 달리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김한울 씨는 “다니던 고등학교에 ‘어린성’이라고 운동했던 소모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90년대 중후반에 논술토론 모임으로 바뀌어버려 참 아쉬웠다”고 말했다.

특히 학복회는 대체로 중고등학생만을 회원으로 두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경우 일반적으로 조직운영과 활동을 그만두는 식이었는데, 한편으로 운동의 연속성이 떨어뜨린 원인이 되기도 했다. 초기 활동가들은 발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를 규제했지만, 이후 중고생 이외의 참여를 제한하는 엄격한 내부규율의 결과를 가져왔다. 또 온라인 중심의 소통방식은 광범위하고 신속한 전파라는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실질적 동력, 힘이 될 수 있는가하는 고민에 빠져들게 했다.


우리의 슬로건은 ‘마르지 않는 10대의 힘찬 함성’

‘어떻게 운동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탄압을 견디는 것 역시 학복회 활동가들 앞에 놓인 난관이었다. 학복회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피해사례가 줄을 이었다. 전영민 씨는 시사주간지에 사진이 실리면서 학교에 알려져 자퇴를 하게 됐다. 전영민 씨는 “하루 종일 학생부실에 붙들려 있었는데 담임이 그때까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교칙을 보여줬다. ‘허락받지 않은 단체나 모임을 결성하거나 참여했을 시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전영민 씨는 “당시에 학교에서 부모님께 심하게 엄포를 놓았던 것 같은데 정말 치사할 정도였다”며 “하지만 그럴수록 나름대로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고 다짐이 들었고, 학복회는 포기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나정훈 씨 역시 활동을 하면서 가지고 있게 된 타 단체 명함을 교사한데 압수당하면서 학복회 활동이 학교에 알려져, 자퇴를 한 경우이다. 나정훈 씨는 “그때 교사가 ‘너 뭐하는데, 이런 걸 가지고 다니냐’며 혼내다가 뺨까지 때렸는데, 그런 일을 당하니까 정말 다시는 학교에 안 온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만두게 됐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학생의 교내·외 활동을 통제하는 이러한 교칙은 10여년이 지난 현재 중고등학교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교내외 자유로운 집회와 모임은 통제되고 선전물 배포, 서명운동도 학교 징계위원회 사안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넘쳐나는 인권 이야기?

학생들 스스로 인권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이후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정부정책에서도 ‘인권’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소위 인권대통령을 시작으로, 정부와 사회에서도 각종 인권의 슬로건이 쏟아지고, 심지어 91년 UN에 가입하고도 내내 잠자고 있던 어린이청소년권리협약까지도 빛을 보기 시작하며 어린이와 청소년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던 때였다.

교육부에서도 98년 UN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기념하며 12월10일 세계인권의 날, 학생인권선언을 공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98년 11월 학생인권선언제정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학생인권선언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갖고 학생인권선언 시안을 발표했다. 공청회에 참가했던 인권운동사랑방 배경내 활동가는 “교육부가 학생인권을 보장하고자 하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최초의 문서라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실제 시안의 내용은 애매모호하고 인권기준으로 보기에 불충분했다”고 말한다. 배경내 활동가는 “당시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름뿐인 학생인권선언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고, 또 “준비 단계에서부터 현장 교사들과 학생들을 제외하고 일방적으로 진행돼 비난 받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결국 정부주도의 학생인권선언은 학복회를 비롯한 인권단체들의 비난 속에 유야무야됐다. 반면, 학복회에서 준비한 만 98년 11월 3일, 학생의 날을 기해 발표됐다. 이 학생인권선언은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한 것으로 관심을 모았다.

김한울 씨는 “청소년 문화센터에 간적이 있는데,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발전이 없었다. 물론 그런 공간도 필요하지만 오히려 문화센터 같은 게 학생들의 불만을 학교 밖에다가 배출하게 하고는 실제로 저항정신까지 흡수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학복회가 학생인권을 운동적으로 이야기한 최초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며 “운동이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90년대 중후반 우후죽순 생겨나던 청소년을 위한 ‘문화’와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경험하면서 체득한 ‘청소년 인권운동’의 방향이라는 것.

95년부터 시작된 학복회 활동은 99년 말 대중적인 중고등학생운동의 조직을 고민하게 되고, 2000년 ‘학생인권과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을 준비하면서 21세기를 맞게 되었다.
인권오름 제 26 호 [기사입력] 2006년 10월 25일 2: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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