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②] 민주화의 불꽃, 학교를 삼키다

87년 민주항쟁과 고등학생운동, 청소년인권운동의 뿌리

전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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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운동의 맹아는 87년을 정점으로 타오른 민주항쟁의 불꽃과 이른바 ‘참교육 1세대’들의 참교육운동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전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987년 12월, 150여명의 고등학생이 명동성당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주교육 쟁취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19일부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때는 바야흐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군부독재 정권과 한 몸통이나 다름없었던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12월 16일)된 직후. 당시 농성에 참여했던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회’(서고련) 학생들은 13대 대통령선거는 부정선거인 만큼, 비록 민정당이 승리했더라도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87년 민주항쟁의 상징이었던 명동성당으로 찾아들었다.

민주화 세력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일어설 것이라는 이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5박 6일간의 투쟁은 쓸쓸히 막을 내렸고 농성 참가자들은 제각각 흩어졌다. 그러나 이 농성은 80년대 중반부터 전사회적으로 확산됐던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매우 주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87년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던 민주화의 불꽃이 미완의 불꽃으로 사그라질 위기에 처했을 무렵,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했던 고등학생들의 외침은 그만큼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 고등학생들의 운동이 좀더 조직화된 방식으로 학교의 변화를 넘어 정치의 중심으로까지 파고들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민주화라는 대격변이 열어젖힌 ‘인식과 실천의 해방구’가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두환 신군부정권 하에서 강요됐던 억압적 입시체제 아래서 바로 옆 친구들과의 치열한 경쟁만을 강요했던 학교에 대한 저항의지는 그렇게 민주화의 열기와 맞물리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학내 민주화와 인간다움을 찾아

80년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삼청교육대 설치 등 이른바 ‘사회정화’ 조치를 통해 정권의 기반을 다진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은 교육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7.30 교육개혁조치’ 이후로 강화된 입시경쟁, 학도호국단을 통한 군대식 통제도 고등학생들의 열망과 외침을 막지는 못했다. 특히 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는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학내 민주화와 인간다움, 비리 척결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위 사진:청구상업학교 교사, 학생들이 서울시교위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85년 3월 의정부시 복지중고에서는 잡부금 징수 금지, 학교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수업거부와 인근 야산에서의 농성이 시작됐고, 같은 해 목포여상에서는 여고생들이 학교측의 교사 탄압에 항거해 수업 거부, 등교 거부, 시험거부 등으로 맞섰다. 85년 ‘민중교육지’에 대한 정권의 대대적 탄압 이후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오른 교육민주화 운동은 고등학생운동의 성장에도 불을 댕겼다. 이듬해인 86년 5월에는 원주고를 시작으로 원주시 몇 개 고등학교에서 자율학습을 거부하고 학생들이 집단 귀가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고, 7월 서울의 중대부고에서는 2학년 학생 5백여 명이 두발자유화, 자율학습 폐지, 강제 보충수업 금지 등의 요구를 내걸고 운동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비록 이들의 투쟁이 연속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와 인간다움에 대한 열망은 그렇게 전국 곳곳에서 학교의 빙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반장에서 대통령까지 직선제로

87년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생들의 요구는 점차 학도호국단의 자리를 대신한 학생회의 직선제 쟁취 쪽에 무게를 두기 시작한다. 학생 자신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공감대를 넓혀나갔고, 대통령 직선제 쟁취의 경험은 학생회 직선제 쟁취 운동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87년 3월 진주 대아고에서, 4월에는 서초고에서 직선제 학생회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6월항쟁 이후에는 그 움직임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경기도 파주여종고, 광주 대동고, 서울 석관고, 구로고 등 전국 학교에서 폭발적인 시위가 이루어졌는데, 민주적 학생회 쟁취라는 요구를 좀더 분명히 내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0일이 넘게 장기적인 투쟁을 벌였던 파주여종고, 2천여명이 수업거부에 들어간 이래 명동 가두시위와 시교위 농성 등으로 확대됐던 정화여상 등의 사례는 당시 고등학생 운동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는 좋은 보기이다.

위 사진:사진 출처: 중등 우리교육 90년 11월호


학생회 직선제 요구는 고등학교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88년 서울 석관중학교에서는 ‘민주 돌곶이회’라는 소모임이 결성되어 간선제 학생회장 당선을 한동안 저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 교외에서 진행된 4.19 기념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모임을 이끌었던 권혜진 씨(88년 당시 중3)에 따르면 처음에 8명으로 시작했던 모임이 2학기에 들어서면서 60명으로까지 확대됐다고 한다. 혜진 씨는 “87년 6월 항쟁에서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자는 사회적 외침이 중학생이었던 당시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시기였다.”라고 회상한다. 그는 “옆 학교인 석관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 직선제운동을 했기 때문에 ‘종이비행기 날리기’, ‘아침이슬 부르기’ 같은 시위도 볼 수 있었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고, 후배들도 만나 직선제하자고 설득하고 다녔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중고등학생들의 직선제 투쟁은 개별 학교와 직선제 요구를 넘어 지역에서의 보충 학습 철폐 투쟁(보철투)으로 한 단계 올라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전두환 정권의 과도한 입시 경쟁은 학생들을 자살행진으로 몰아넣었다. 학생들은 친구의 죽음을 그저 바라만 볼 수 없었다. 서울지역의 경우, 88년 7월 17일 홍익 대학교 강당에서 1000명이 참석하여 ‘자살학우 추모제 및 교육정상화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추모제와 연극 등 5시간을 진행하고 대회 마지막에 결의문을 채택하여 ‘내신성적 불신경쟁 잃어가는 나의 친구’, ‘살인교육 쫓아내고 민주교육 이룩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광주의 경우, 88년 8월 이미 직선제 학생회가 쟁취된 대동고, 석산고 등에서 1000명 이상이 보충/자율학습 폐지 등의 요구를 걸고 단식투쟁을 벌이자, 일주일도 안돼 광주 지역 30개 학교로 투쟁이 파급되었다. 결국 전국 곳곳에서 해결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광주 시교위에서 먼저 보충/자율 학습 폐지를 선언하게 되었다.

민주항쟁의 경험, 조직화에 불 댕겨

이러한 학내외 운동에 기반이 된 것은 각종 소모임들이었다. 87년의 사회적 격랑을 전후하여 사회모순과 교육모순을 함께 고민했던 학생들은 학교별, 지역별로 다양한 비밀 소모임을 꾸리게 된다. 용산고의 ‘용민민투’, 석관고의 ‘석민연’, 대원고의 ‘목마름’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소모임에서는 학교문제를 고민하면서 교내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한편, 사회 문제에 대한 토론과 학습도 이뤄졌다. 고등학생 소모임은 87년 민주항쟁의 영향을 받은 고등학생들의 자발적 참여와 함께 고등학생운동을 고민해온 기존 활동가들의 결합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당시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활동가였던 강주성 씨는 “그때는 지역별로, 학교별로 소모임이 많았다. KSCM이나 푸른나무 이야기모임 같은 공개단체에서 활동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언더에서 소모임으로 활동하던 학생들도 많았는데, 그런 모임을 지원하는 성인활동가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당시 개별 학교 차원을 넘어 고등학생들이 참여했던 대표적 공개단체는 흥사단과 KSCM이 있다. 흥사단 서울지부가 개최한 87년 11월 학생의 날 행사에는 1천5백여 명의 중고생이 참석하여 공식적인 대중집회의 물꼬를 텄다. 흥사단은 그 후 고등학생아카데미(고아)를 통해 고등학생들의 사회참여 활동을 지원했고, 특히 KSCM과 함께 4.19 기념행사나 학생의날 행사를 대규모로 열어 당시 학생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KSCM은 88년 2월 ‘자율적 학생회를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는데, 이 공청회에만 4~5백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이들 공개단체들은 ‘학생회비 운영’, ‘소모임 운영’에 대한 공청회를 계속 이어가면서 고등학생 운동의 의제를 던지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푸른나무 출판사에서 만든 무크지를 통해 모인 ‘푸른나무 이야기모임’도 있다. 는 당시 진보적 교사와 학생들에게 알려진 청소년 잡지로 학생회 직선제와 자율적 학생회 운영에 대한 토론,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읽자는 주장 등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내용의 공개단체 활동은 9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푸른나무 이야기 모임과 KSCM을 지도했던 강주성 씨는 87년을 기준으로 전후 고등학생 운동의 차이를 ‘대중성’에서 찾는다. 주성 씨는 “고등학생 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도 학생회 직선제 구호나 공개활동에 대해 ‘정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중운동이 되려면 대중들의 요구와 정서에 맞게 내용과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한다. 당시 고등학생 운동으로 활발히 전개된 학생회 직선제 운동은 대중성에 기초한 활동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고등학교에서 흥사단 활동을 한 권혜진 씨는 ‘조직화’에서 특징을 찾았다. “87년 이전은 자발적 운동의 태동기라고 생각된다. 그러던 것이 87년 6월 이후 조직적 흐름을 가지게 됐다.” 87년 이전의 고등학생운동이 산발적이고 고립적으로 이뤄졌다면, 87년 이후의 도드라진 점은 바로 대중성에 바탕을 둔 조직화가 이루어진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인권운동의 맹아이자 뿌리

당시 고등학생 운동은 민주화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 고등학생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독재정부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나아가 모순으로 얼룩진 사회에 파열음을 내며 조금씩 열려지고 있던 변혁의 공간에서 고등학생들은 자신들만의 운동 의제도 찾아나갔다. 민주화와 자신들의 삶 사이에 가교를 놓으면서 독자적인 운동의 세력화를 꿈꿨던 것. ‘학생자치권 보장’, ‘두발자유화’, ‘보충.자율학습 철폐’ 등의 구호는 학교의 민주화, 학생 삶의 민주화를 요구했던 것이었다. 당시 터져 나온 구호들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학생 청소년 인권운동에서 핵심적인 과제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당시 고등학생운동이 지금의 청소년인권운동의 맹아이자 뿌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급작스런 성장만큼 한계도 존재했다. 개별 학교를 잇는 조직적 연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에 발맞추어 상대적으로 운동의 경험이 적은 고등학생들에게도 너무 많은 짐을 지우면서 부담을 주었던 점도 힘겨움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용산고에서 ‘용민민투’ 활동을 한 서준섭 씨는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면서 현재 인권운동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전한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 고등학생 운동이 제 삶의 뿌리에요. 정신적으로 성장했던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그 어린 나이에 사회랑 부딪치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시행착오도 겪었고. 지금 친구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했던 친구들도 지금 와서 약간 회한 같은 게 있으니…. 그 나이에 움직이고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고, 그렇게 하려면 강해야죠. 무척 강해야지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인생에 밑거름이 되고 계속 발전할 수 있고…. 청소년들이 많이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농성 시작일에 대한 기억의 혼재

* 신문 등 공식 기록상으로 농성 시작일이 19일로 되어 있지만, 농성 참가자의 증언 중에는 16일 대통령 선거 당일부터 명동성당에 모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전누리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권오름 제 6 호 [기사입력] 2006년 05월 31일 1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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