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숙 폭동] OO군과 △△양이 아닌 '나'로서 사는 방법

청소년과 젠더 규범

디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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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자 혹은 여자로서 불리게 된다. 이것은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서의 기대되는 역할을 받고 그것에 맞춰 행동하도록 하는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어긋나면 갖가지 모욕적인 표현과 차별적 시선에 시달린다. 그런 역할과 압력이 못 견딜 지경이라고 생각하는 본인의 의사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사회화'의 과정에 직접적으로 놓여 있는 청소년들은 이런 압력과 폭력이 바로 향하는 대상이다. 당사자들과 그 대변인들이 모두 모여 힘들게 만들어 놓은 학생인권조례가 여러 차례 무력화의 위기 안에 놓이면서도, 그렇게 힘겹게 힙겹게 현장 속에 뿌리를 내려서인지, 교육 현장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양성성(이 용어에 대해서 불만은 있지만)’에 대해서도 수업 중에 언급한다든가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성 역할에 관련된 모든 규범들과 사회적 규칙들이 현실에서 아직도 청소년에게 행하는 폭력의 수위는 낮아지고 있지 않으며, 씩씩하고 진취적인 OO군, "나이답지 않게(?)" 조신하고 아름다 운 △△양 같은 표현들이 그대로인 현실이 이를 반영한 다.

내가 10대 섹슈얼리티 인권모임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유난히 이 ‘비청소년’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가 유난히 청소년에 요구하는 것은 많고, 인간으로서 타고난다는 기본권은 어째서 철저하게 유린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특히나 사회에서 명명한 성이 아니라 자신이 타고났다고 믿는 성(젠더)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해서 믿고 그것에 맞춰 살아가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핵심적인 기본권이다. 학교를 비롯해서 청소년 관련 기관들, 청소년이 일하는 곳과 가정, 놀러 다니는 곳들 등 일상생활에서 이것은 강하게 부정당한다.

주민등록번호 1에 집착하는 학교

자연스럽게 나는 내가 청소년이었던 시절과 비교해서 지금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아졌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지금이야 성별 따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람이고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 그게 자연스러우니까!)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1’로 시작하고,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사람이지만 여성이 아닌 남성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라고 나를 규정짓는다. 그렇지만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정말 생존의 위협을 겪어야만 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격렬하고 사납고, 거친 활동을 어릴 때부터 싫어했고 말도 행동도 부드럽고 조용조용하게 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여자’ 소리를 들었다. 장난삼아 “너는 여자면서 남자중학교에 왜 왔어”라는 말부터 “너는 여성 호르몬이 막 분비되냐?”라는 조롱 섞인 농담과 “너는 달리기를 하면 경보로 해야지!” 라는 말까지 들었고, 폭행도 많이 당했다.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극도의 수치감을 느끼기에 앞서 더 이상의 폭력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던 나날들이었다. 당시에 매스컴이나 교사들이 주로 얘기 하곤 했던 “학교 폭력을 해결하겠다”는 말은 너무나도 공허하게 들렸다. 그 이유는 학교를 비롯한 사회와 기관들이 이미 그 폭력을 주도하고 집행하는 공범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주민등록 ‘1’에 걸맞은 행동을 남학생에게 하기를 원했다. 체육시간에 축구를 잘 못 하면 하다못해 같이 배려해주면서 하는 프로그램을 짜기보다 “공이 무서운 여자아이” 취급을 했고 약해빠지고, 마음씨가 여려 보인다는 이유로 여자가 된 나는 체육 교사들을 비롯한 학생 선도부가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졌던 학생들에게 보였던 경멸적인 시선을 당연히 잘 체감할 수 있었다. 남녀공학을 다니든 그렇지 않든, 남녀가 함께 수업을 듣든 아니든, 그 시선과 역할을 부여받았음에도 잘 수행하지 못하면 유무형으로 주었던 압박은 동일했다. 남학생이 “여자”로 낙인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고 난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한 몇 달 간 사나워 보이는 연습을 했던,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여곡절 많았던 그런 시절을 그렇게 ‘견디어왔다.’

위 사진:발레하는 소년을 다룬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

생각해 보면, 성별을 강제로 나누고 거기에 걸맞은 행동 양식을 기대하는 것은 국가와 그것을 운영하는 권력들의 편의성만을 고려하여 임의로 정한 것에 불과하다. 원하는 대로 편하게 부려먹기 위해서 당사자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 단 두 가지만의 젠더를 설정했고 그것을 제멋대로 부여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자신들과 닮은, 자신들의 방식인 권위주의적인 성 역할을 ‘남성성’의 이름으로 정립해 놓고 남성으로 명명된 이들을 여기에 맞춰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끔, 여성으로 명명된 이들 또한 일정한 역할을 지우고 그렇게 세상을 운영하려 한다. 내가 여자아이로 불리면서 체감할 수 있었던 수치심은 바로 ‘남성성’을 얻지 못한 혹은 얻기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여성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함의들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사례이지 않을까.

이런 정치적 고려에 의해 만들어진 성별이 제대로 작동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 집행을 위해서 사회화 기간이라는 일정 시간 동안에 강제적으로 주입한다. 흔히 말하는 청소년기는 이 기간에 해당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는 압박이 한층 더 강하게 작용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말할 수 있도록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사회를 향해 외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게 해주고, 내가 내 방식대로 사랑하게 해 달라”고. 아직은 나이가 어리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 그렇다고, 그렇게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좀 너 나이답게 굴라고 말하기 전에, 얼마나 갖은 고생을 하고 당신의 시선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짐작을 해 달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강제로 ‘남자’, ‘여자’의 번호를 부여하고 그 기준으로 만든 시스템에 작동하는 기계가 되지 않으면 탄압하는 규범이 여전히 살아 있다. 가지 못하게 막고,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듣지 못하게 귀를 가려 놓으면서 그들은 미성숙하니 지켜줘야 한다고 한다. 진짜 ‘성숙’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어딜 감히 미성숙 운운하며 보호를 논하는지....

아직도 학교에서는 남학생 여학생 역할 구분 놀이를 일삼고, 거기에 안 들어가려는 이들을 배제하고, 그리고 술집에서, PC방에서, 찜질방에서, 모텔에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공원에서 나이를 확인하고 내쫓으면서 “아이들을 지켜냈다!”고 외치는 목소리들이 여전하다. 그들이 틀렸음을, 지켜내지 못했다고 내 존엄과 내 가치는 내가 지키겠다고 말하는 운동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리고 남성 여성 그딴 거 없이 주민등록상에 있는 내 이미지와는 상관없이 나 자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청소년이 겪어야 하는 많은 사회적 압박들 상당수가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
디에고 님은 동성애자인권연대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의 활동가로. 내 인권과 평화와 남의 인권과 평화가 다르지 않다고 믿으며 활동합니다.
인권오름 제 354 호 [기사입력] 2013년 07월 16일 20: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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