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봐] 벽장문이 활짝 열리는 날을 기다려요

한 동성애자 동무의 솔직한 이야기

한국레즈비언상담소 꼬마 H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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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18살 고등학생 레즈비언(*)입니다. 아, 사실 이건 비밀이에요. 학교에서 제 친구들은 제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거의 하나도 모르거든요. 제 친구들은 그냥 제가 남자에 별 관심이 없고 주위의 여자 친구들을 매우 예뻐라 하는, 조금 특이한 아이로만 알아요. 제가 이성애자 흉내를 썩 잘 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숨기려고 신경 써서 노력을 하거든요. 친구들이 남자 얘기를 할 때면 맞장구를 친다던가, 학교에서 좋아하는(척 하는;;) 남자 선생님을 만든다던가 하면서 말이에요. 열심히 맞장구는 쳐주지만,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전! 항상 불편해요. 관심도 없는 남자 얘기를 꾹 참고 듣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거든요.

위 사진:‘이화여자대학교 레즈비언 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에서 주최한 레즈비언 문화제 홍보 포스터
가끔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동성애자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아요. “우웩~!” 인상을 찌푸리고 다른 얘기를 하자며 화제를 돌리는 친구의 반응은 그나마 나아요. 더럽다느니,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느니, 그런 사람들은 다 병에 걸릴 것이라느니 하는 끔찍한 말들을 퍼부어대요. 저는 그럴 때마다 할 말이 없어지곤 해요. 친구들은 제가 바로 그 동성애자라는 걸 알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짓곤 하는, 벌레 보듯 하는 표정을 지을까요?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는 친구들이 제가 레즈비언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친구들이 한 순간에 모두 등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무섭고 슬퍼져요.

그래서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야지! 하고 꼭꼭 다짐을 하는데, 그래도 가까운 친구에게 이해를 받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나 봐요. 최근에는 가깝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했어요. 그 친구는 처음에는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는데, 그게 아닌가 봐요. 제가 가끔씩 동성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때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저한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변태’라고 할 때도 있어요. 저도 제 자신이 변태가 아니란 걸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이 친구는 어떨까…하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이 친구의 진심을 알게 된 것 같아서 씁쓸해 한 적이 많아요.

이제는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아직도 벽장 안에 갇혀 있는 게 너무너무 답답할 때가 있어요. 벽장 안은 너무 어둡고 좁고 불편하거든요. 가끔씩 문을 살~짝 열어보려 하다가도 왠지 무서운 마음에 얼른 닫아버리곤 해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몰라요. 레즈비언들은 더럽고 끔찍한 변태가 아니라는 걸, 저처럼 그냥 평범한 열여덟 살 여고생일 수도 있다는 걸요. 모르면 앞으로라도 알아 가면 될텐데, 사람들은 도무지 알려고 하지를 않네요. 그래도 이 세상의 모든 벽장문들이 화알짝 열리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어서,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 레즈비언 : 여성 동성애자를 부르는 말.
(**) 커밍아웃 : ‘coming out of closet’이란 말을 줄여서 쓰는 건데요. 사회의 편견이나 차별 때문에 벽장 속에 숨어있던 동성애자들이 당당하게 나온다는 뜻이랍니다.


[끄덕끄덕 맞장구]

누구에게나 간직하고 싶은 비밀이 있습니다. 가끔은 비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집니다. 하지만 비밀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공격이나 따돌림을 당하게 될 우려 때문이라면 그런 비밀은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HJ 동무도 무거운 비밀을 간직하고 있네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자연스러운 성정체성임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때문인데요. 심지어 어떤 학교에서는 동성 친구끼리 손을 잡거나 화장실을 같이 가고, 편지를 주고받기만 해도 교무실로 부르거나 벌점을 준다고 해요. 이처럼 동성애를 제거해야 하는 병으로 보거나 청소년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유행 정도로 보면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동성애 혐오를 보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있어야 하고, 가끔은 이성애자로 보이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 건 너무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겠지요.

그런데 말예요. 동무들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쩌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거나 아니면 뭔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동무도 있겠죠. 그럼 한 가지만 함께 생각해봐요. 어떤 동무는 김치찌개를 좋아하고, 다른 동무는 스파게티를 좋아해요. 그런데 누군가가 한국 사람이 김치찌개를 좋아해야지 무슨 스파게티냐며 못 먹게 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한다면 너무나 폭력적으로 느껴지겠죠. 김치찌개를 좋아하면 ‘선’, 스파게티를 좋아하면 ‘악’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성정체성도 마찬가지에요. 좋아하는 음식이 서로 다르듯, 사람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성일 수도 동성일 수도 있답니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도,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도 동무들 곁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혹시 지금도 ‘내가 변태가 아닐까’라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동무들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삐그덕 벽장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말 걸기를 시작한 HJ 동무를 보면서,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삐~그~~~더~억. 어? 저기 한 친구가 벽장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드네요. 방가방가! [김영원]
인권오름 제 30 호 [기사입력] 2006년 11월 21일 21: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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