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라의 인권이야기] 한 홈리스 할아버지의 죽음, 후(後)

박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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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6일 꽤 오랜 시간을 만나왔던 70대 홈리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7년 전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 자원활동을 하며 종로의 한 역사지하도에서 만난 할아버지였다. 그는 매주 한 번씩 만날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 손녀에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인 듯 재미있게 들려주시곤 하셨다. 과거 열심히 일했던 무용담, 가족, 노숙을 하게 된 계기와 어려움, 건강문제, 급식의 평가, 종교단체 구제금, 주변 사람에 대한 것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다. ‘별것도 아니구만!’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할아버지도 나도 매주 목요일 만나는 시간을 기다렸고,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그 시간만큼은 지키려고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는 동안 꽤 친해져있었다. 그 다음엔 할아버지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주거지원을 안내했고, 긴 설득 끝에 고시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이후 국가유공자 지원금과 기초생활수급 급여도 받게 되었다. 보건소를 통해 틀니도 무료로 맞췄다. 거리 노숙할 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주거가 생기자 복지지원도 시작되었다.

냄새나고 비좁은 방 생활이지만 거리생활보다 좋고, 딱딱한 콩자반도 잘 씹어서 드실 수 있을 즈음,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손에 변형이 심해지면서 할아버지 스스로 단추조차 채우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걱정이 되어 방문간호사과 요양원을 이야기해봤다. 임대주택도 신청해보자고 설득 해봤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지 않아하셨고, 홀로 뚝 떨어져서 생활하기는 더더욱 싫다고 하셨다. 옆방 사람의 코고는 소리, 가끔 들리는 말소리가 시끄러워도 혼자가 아니란 생각을 갖게 해주니 적적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병원 응급실에서 나를 맞았다. 일주일이 넘도록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며 반가워하시는 할아버지는 관절염으로 인한 폐렴 등이 와서 몸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으셨다. 전문적인 치료를 원하셔서 비싼 병원이지만 그곳에 입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24시간 함께할 보호자 내지 간병인이 있어야 입원이 가능하단 대답을 들었다. 사회사업실과 구청에 연락도 해봤지만 당장 지원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급히 알아본 사설 간병인도 장기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환자안심병원도 자리가 없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난하고, 아픈데 24시간 붙어있을 마땅한 사람도 없는 할아버지의 현실에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울어버렸다. 이 모습을 본 원무과에서는 요양병원이라도 가시면 어떻겠냐고 안내했고, 결국 9시간 만에 응급실을 떠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병원에 가는 내내 할아버지에게 있었던 내용을 설명해드렸더니, “괜찮아”라고 하셨다.

다음날 중환자실에 갔더니 병원 간병인의 도움으로 할아버지는 한결 깨끗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날 험난했던 하루를 보내면서 할아버지의 몸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져 있었다. 밤새 끙끙거리셨다 하셨고 숨소리도, 가래 끓는 소리도 심해지셔서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눈도 뜨지 못했고, 밥알만 간신히 씹기만 할 뿐 목구멍으로 넘기질 못하셨다. 내일 만남을 기약하고 가려고 하니 할아버지는 “가지마, 가지마”라고 힘겹게 한마디씩 내뱉으셨다. 그 소리가 얼마나 구슬프던지. 그날 저녁 할아버지가 머물던 고시원 방 정리를 하러 갔다. 몇 년간 버리지 못하고, 정리되지 않은 채 꾸역꾸역 쌓여있고 박혀있던 온갖 물건들이 할아버지의 허한 마음을 채워주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다음날 새벽 병원에 전화하여 할아버지의 안부를 물었었는데, 그로부터 4시간 뒤에는 사망소식을 들었다.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도 장례준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찰나, 남아있는 절차가 있었다. 구청에서 할아버지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먼저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병원 안에서 4시간여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여 할아버지의 시신은 타병원 안치실에 모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을장례지원단인 ‘나눔과나눔’에서 연락이 왔다. 가족이 할아버지의 시신인도를 포기했고 주민센터의 연락을 받았다며 무연고자에 대한 장례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례를 치러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비용문제도 간과할 수 없었으니..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십여 년 가까이 연락한번 없었던 가족에게 할아버지가 또 버림받았단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처음부터 이런 혈연에 의지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걱정 없이 장례준비를 척척 진행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홈리스로 살아온 할아버지의 7년은 가족보다 우리들이 더 많이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 다음날 ‘나눔과나눔’에서 할아버지의 빈소를 마련해주셨다. 할아버지 유품인 가방 안에는 미리 준비하신 듯 사진이 있어서 곧바로 영정도 준비되었다. 초와 향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빈소가 차려진 것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나머지는 할아버지를 찾아온 사람들과 하나씩 채워나갔다.

응급실에서 김밥이 먹고 싶다 하셨던 할아버지께 따뜻한 김밥한줄, 붕어빵, 평소 맛있게 드시던 귤을 영정 앞에 준비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담배, 그리고 술까지.. 격식을 차리진 못했으나 모두 할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할아버지와 같은 곳에서 노숙을 하셨던 아저씨들, 오래 만난 학생들, 실천단 활동가들과 홈리스야학 학생들이 오셔서 나머지 부분들을 채워주셨다. 각자가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잘 모르더라도 함께 슬픔에 잠기기도 했다. 거리노숙을 함께 하신 아저씨들은 상주까지 하셨고, 가시는 길 적적할까봐 빈소를 비울 수 없다며 함께 주무셨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엄숙하게 염을 지켜보고, 양복을 차려입지 않았지만 관 운구를 자청했다. 화장장까지 동행하며 할아버지가 한줌의 뼈 가루가 될 때까지 기다려드렸다. 아마 할아버지도 외로운 방에서 혼자 돌아가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억지로 끼어 맞추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미리 준비하신 것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후 장례의 전 과정은 소박하지만 정성이 있었고,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함께 기억하는 과정이 있어서 무탈하게 끝날 수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잘 보내드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똑같다. 그게 한 나라의 수장이거나 빈곤한 홈리스건 간에 인간답게, 존엄하게 죽어갈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 이후가 두려울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며 그 누군가에게 국밥이라도 한 그릇 하라고 10만원을 남겨두셨던 한 노인과 내가 만난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고,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 가난하고, 거리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이들의 죽음까지 차별받는 것 같아 씁쓸했다. 죽은 사람들의 몸을 삽시간에 처리(화장)해야 할 물건처럼 여기고 비용을 계산하기보다, 누군가 상주가 되어주고, 빈소를 지켜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인의 살아온 삶을 함께 기억하고, 위로받을 수 있도록, 인간적인 예의와 정성을 다해 마지막을 같이 있어줄 수 있도록 돕는 구체적인 체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할아버지를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되었고, 최소한의 도리를 지킬 수 있도록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시고, 함께 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 그리고 존엄한 죽음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가 생겼으니 이제 더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박사라 님은 '홈리스행동' 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414 호 [기사입력] 2014년 11월 07일 19: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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