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의 인권이야기] 우리에게는 정의실현과 재발방지에 대한 권리가 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사회적 해결을 위한 24시간 이어말하기

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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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전과는 다른 사회를 만들자며 ‘4.16 존엄과 안전에 관한 인권선언’(이하 4.16 인권선언)이 제안됐다. 참사 이전과 다른 사회는 무엇일까? 참사의 원인이 이윤을 앞세우고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현실에 있었으니, 이런 현실과 단절하자는 것이었다. ‘안전’이 중요하다고 했는데도, 이런 참사가 벌어졌으니 인간의 존엄에 기초하여 안전을 재정의하자는 제안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여러 개인과 풀뿌리 단체들이 모여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과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지 토론하고 결의하는 과정이었고,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위 사진:출처: 반올림

내가 함께 하는 단체에서도 4.16 인권선언 제정을 위한 토론을 했는데, 4.16 인권선언 제정위원회에서 발간한 토론자료를 읽다가 가슴을 치는 부분이 있었다. “피해자들에게는 1) 진실에 대한 권리, 2) 정의실현에 대한 권리, 3) 배상에 대한 권리, 4) 재발방지와 제도 개혁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이기 때문에, 여러 산재 피해자들을 만난다. 많은 환자들과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 함께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 피해자들을 이런 권리의 주체로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반성이었다.

일하다가 다친 사람들에게, 자기가 일했던 곳에서 똑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해서 다른 동료가 다치거나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며, 안타까운 느낌일지 헤아려보지 못했다. 자신은 이미 다쳤지만, 계속 반복되는 사고라면 예방 의무를 게을리한 책임자를 밝혀내고, 당신의 사고를 계기로 동료들에게는 그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진다면 일말의 위로가 되지 않을까.

지난 3월 초 뉴스타파에도 보도됐던, 부산 신세계 백화점 공사 현장의 산재 은폐 시도 의혹이 있었다. 홀로 1인 시위를 하며 대기업과 싸우던 고인의 부인은 ‘아이에게도 나중에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말해줘야 하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는 것이 모든 치유와 보상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그녀에게는 밝혀진 진실에 따라 책임자에게는 응당한 처벌이 내려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정병원 후송’이라는 말도 안 되는 관행을 뿌리 뽑는 것은 죽음에 대한 금전적인 배상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위 사진:출처: 반올림

그런데 사실 이 얘기를 아주 오래도록 해온 운동이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 지킴이 반올림이다. 2008년 결성된 반올림은 철저한 원인 규명, 책임자의 사과와 차별 없는 보상, 그리고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8년간 싸워왔다. 오랜 싸움 속에 작년 10월 제3의 기구인 '조정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져 여기서 조정안을 내기로 겨우 합의가 되었다. 지난 7월 조정위원회에서 조정안을 제출했는데, 삼성이 다시 이를 무시하고 '보상위원회'를 따로 만들겠다고 나섰다. 조정위원회 안 중 삼성과 핵심적으로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기도 한데, 삼성은 조정위가 제안한 1,000억 원을 내놓더라도 독립적인 법인이 아니라 본인들이 관리하는 보상위원회를 통해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의 요구로 애초 계획보다 두달 늦게 열린 10월 7일 조정위원회 자리에서 드러난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이 ‘보상위원회’라는 것이 신청을 하면, 보상금을 지급하는 구조도 아니라는 것이다. 삼성이 피해자들을 한 명씩 찾아가 개별 협상을 하겠다고 한다. 삼성 직업병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위해 조정위원회를 구성하자던 입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 나오는 것처럼, 백지 사직서 가지고 와서 도장 받고 돈 내밀던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을 보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이 내미는 돈을 개별적으로 피해자가 받는 것, 그리고 직업병의 원인 제공자로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삼성이 출연한 돈을 독립적인 외부기관이 관리하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삼성이 독립적인 법인 설립을 회피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피해자 존중의 원칙에 뜻이 없음을 보여준다. 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피해자들을 괴롭힌 질병의 원인이 삼성의 직업 환경에 있었다는 진실을 드러내고, 이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진다는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직업병 피해자들이 싸워온 또 다른 대상인 허점투성이의 산재제도 개혁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서울 시내 한복판, 강남역 인근 삼성전자 서초 사옥 바로 앞에서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사회적 해결을 위한 24시간 이어말하기가 10월 7일부터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영화를 보다가 황유미 씨(극 중 윤미)가 죽는 장면에서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늙은 아버지가 찬이슬을 맞으며 노숙 농성 중이다. 삼성이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말하는 대로 돈을 더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피해자로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자신들의 피해로부터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농성장에서 사용할 빠렛트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 노숙투쟁, 고공농성, 단식 투쟁 등이 많지만, 지금 이 순간도 진실에 대한 권리, 정의실현에 대한 권리, 그리고 재발방지와 제도 개혁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계속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 직업병 피해자들에게도 연대의 손길을 부탁한다.

*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사회적 해결을 위한 24시간 이어말하기
매일 저녁 6시,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 삼성반도체 직업병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집중 문화제 “방진복이 빛나는 밤에”
10월 16일 금요일 저녁 7시,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덧붙이는 글
최민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이며 직업환경의학전문의입니다.
인권오름 제 458 호 [기사입력] 2015년 10월 13일 21: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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