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척이다]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 인권을 위한 전쟁?

유엔 평화유지군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과 한국군 해외파병

이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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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로 글을 쓰려 하니 전제해 두어야 할 것도 많고 두루뭉술한 결론조차도 없을 것 같아 걱정이 먼저 앞선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했던 이라크 파병과 파병연장은 차라리 얘기하기가 ‘편하다’. 고(故) 윤장호씨의 죽음을 불러온 아프간 파병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미국의 ‘반공 동맹군’으로 참전해 숱한 희생을 불러온 베트남전쟁 참전과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동맹과 국익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재삼 확인시켜줄 뿐이다.

아프간과 이라크 파병에서 내세웠던 ‘인도적 지원’과 ‘평화재건’이라는 구호는 허울뿐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지 오래다. 더 이상의 동맹의 논리와 국익론은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 스스로도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느니,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밖에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누구의 국익인지, 누구를 위한 국익인지’ 도무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말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침략행위에도 동참할 수 있다’는 부도덕한 명제를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우리 사회에 만연시키고 있다. “파병반대”는 속 편한 이상론자들의 수사에 불과하고, “파병결정”은 치열한 고민의 결과인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전사회적인 도덕 불감증!

위 사진:분쟁지역에 파견된 유엔 평화유지군의 모습. 과연 군대를 통해 평화와 인권을 지킬 수 있을까?

인도적 ‘군사 개입’? 인권을 위한 군대?

여기서 아프간과 이라크 문제를 벗어나 조금만 시야를 확장시켜보자. 예컨대, 1999년에 한국군은 동티모르에 유엔 평화유지군(PKF)으로서 ‘상록수부대(특전사 중심으로 구성)’를 파병했다. 당시에도 한국군의 동티모르 파병은 베트남전 참전 이후 최초로 전투병력을 해외에 파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또한 전투지역에서의 실제 전투 발생 가능성으로 인한 ‘위험성’도 논란의 한 요인이었다. 유엔 안보리의 결의와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평화와 인권이라는 국제사회의 대의에 한국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결단’이었으며, 또한 현지 주민들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어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전해졌다. 특히, 동티모르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구스마오 대통령이 방한해, 한국의 파병과 전폭적인 지원 등에 대해 감사의 뜻을 직접 전하면서 논란은 성과에 대한 자부심으로 변했다. 물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노린 정치적 계산이었다는 ‘음모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타산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을뿐더러,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마저 그런 정치적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추측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를 논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전투병력을 파병할 필요가 있었나’, 그리고 ‘전투병력을 파병하지 않고서라도 동티모르를 지원할 방법은 있지 않았나’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사실, 전투병을 파병한 효과와 다른 방식으로 한국정부가 동티모르를 지원한 효과에 대한 대차대조표는 어디에도 없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당시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압제로부터 갓 벗어난 신생국가였고, 여전히 인도네시아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 군부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의 공격과 위협으로 인해 민간인들은 무차별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고, 민주적 투표와 선거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유엔과 국제사회가 동티모르사태에 군사적 개입을 결정한 것은 그와 같은 상황을 반영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동티모르 민중들의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도 크게 작용했다.

동티모르에는 여전히 유엔평화유지군이 주둔해 ‘평화유지활동’을 하고 있다. 여기서 동티모르의 독립과 안정이 유엔과 국제사회의 ‘군사적 개입’ 덕인지 아닌지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도적 (군사)개입은 형용모순’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회색지대’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정치적 행동에는 항상 정치적 의도가 내재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정치적 의도와 타산의 개입을 문제시 할 것이 아니라, 그 정치적 결정의 과정과 결과를 가지고 평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인도적 (군사)개입’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위 사진:영화 <호텔 르완다> 포스터. 유엔은 1990년대 르완다에서의 대규모 인권침해를 해결하기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
영화 의 배경이 되었던 1990년대 르완다의 상황은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당시 르완다에는 5백여명의 유엔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있었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유엔평화유지군의 로미오 돌레르 소장은 ‘5백명의 유엔평화유지군으로는 학살을 막을 수 없다’며 강대국의 군사적 개입을 강력히 희망했다. 르완다의 사례는 유엔의 군사적 개입으로도 결국 학살을 막지는 못했다(유엔의 군사적 개입 무용성)는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반면에 긴급한 인도적 재난의 경우에는 인도적 군사개입의 수요가 탈냉전의 국제사회에 엄존하고 있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고 있기도 하다.

르완다와 또 다른 아프리카 분쟁의 대표적 사례인 소말리아 사태는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임하고 있는 미국과, 국제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강대국들의 이중성의 예이기도 하다. 자국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는 비난을 무릅쓰고도 군사개입을 하면서, 그렇지 않은 국제문제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인도적 군사개입의 필요성’을 전제로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

그렇다면 우리는 인도적 차원의 군사행동을 인정하고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처음에 언급했던 ‘한미동맹 강화론’이나 ‘국익론’과는 차원이 다른 논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그 ‘인도적’이라는 것을 누가 규정하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와 국제사회의 결정과정이 극히 비민주적이라는 점과 연관된다. 특히 유엔의 경우 무기력한 총회와 안보리의 전횡적 행태는 유엔(혹은 유엔안보리)의 결의가 곧 국제사회의 의사일 수 없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또한 ‘누구를 위한 인도주의인가’라고 했을 때, 예를 들면 르완다의 민중, 소말리아의 민중, 동티모르의 민중들의 집합적 의사를 어떻게 확인하고 반영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때로는 일방의 침략적 행위에 의해 전쟁 혹은 분쟁이 야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의 합의에 따른 중립적 결정이라는 명분으로 ‘중재’를 강제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는 레바논의 경우다. 레바논의 상황을 정확히 반영했다면 유엔 결의는 침략국 이스라엘의 불가침을 강력히 요구하고, 이스라엘을 ‘제재’하는 방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이 주도한 유엔 결의안은 ‘이스라엘 예외주의’가 또다시 반영되었다. 형평성을 상실한 유엔 결의안에 따라 파병된 유엔평화유지군이 중동 분쟁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의 평화유지군 파병은 ‘블루헬멧(유엔 평화유지군이 쓰는 전투 헬멧)’을 쓰게 되었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이다.

위 사진:<출처; www.cyberhumanrights.com>

특히 우리 국내의 파병결정 과정을 본다면 ‘군대의 해외파병’을 열어둔다는 것은 자칫 한국이 ‘상시적 파병국가’, 혹은 미국과 같은 ‘일상적인 전쟁국가’로 전락하게 될 위험성을 갖고 있다. 최근 빈발하고 있는 ‘묻지마 파병’은 그 위험성에 대한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한미일 동맹재편이 한국의 군사적 역할 증대를 독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기우가 아니다.

또한 파병결정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현지의 상황과 현지 민중들의 의사, 한국군의 임무와 역할 등이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 단지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로서’, ‘경제 위상에 걸맞는 국제공헌을 위해서’라는 단순 명쾌한 논리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설사 형식적인 공론화의 절차를 거친다고 해도 그것을 민주적 결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외파병 자체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의 해외파병은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타당하며, 만약 예외적 상황이 생긴다면 예외는 ‘예외’로서 다루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물론 그 근저에는 군대를 통해 인도적 문제의 해결을 이룬 사례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역으로 상황 악화를 초래한 경우가 훨씬 많다는 좀더 의미 깊은 근거가 자리하고 있다.

‘평화만들기’를 위한 상상력과 구체적 실천

이 주제는 전쟁을 인도적 군사개입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며, 동시에 ‘정의로운 전쟁’은 존재하는가라는 국제정치의 오래된 질문과 연결되기도 한다. 조금 좁혀서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평화와 인권의 실현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미국과 유럽의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코소보 내전에 대한 미국과 나토의 개입을 두고 대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면 고민해 볼 여유가 없었다. 사실, 2003년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논란에 이르러서야 다른 나라의 평화와 우리의 평화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한 한국의 기여방식에 대한 논의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한 ‘평화만들기(peace making)’에 대한 제한없는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나는 ‘무력과 군사력에 기반하지 않는 평화’, 즉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가 진정한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이 즉각적으로 ‘인도적 군사개입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인권제국주의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례를 찾고 대안을 제시하며, 구체적 실천으로 만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군대를 통한 인도주의(혹은 평화와 인권)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면, 다른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평화는 영화 의 ‘목가적 환타지’의 이미지는 아닌 것 같다. 그 평화는 너무도 유약하다. 어쩌면, 평화는 ‘여유로운 전원적 풍경’이 아니라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치열함’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이준규님은 평화네트워크 정책실장입니다.
인권오름 제 52 호 [기사입력] 2007년 05월 02일 1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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