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상의 인권이야기]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

박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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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란 누구인가.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불우한 의식을 가진 자’로 규정한다. 사회 중간 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지배계급은 지식인을 지배수단을 연구하는 단순한 기능인, 다시 말해 불편하더라도 없으면 안 되는 필요악으로 여긴다고. 반면 피지배계층은 지식인을 지배계층의 앞잡이로 볼 따름이라고. 하지만 사르트르는 ‘권한의 밖’까지 관여할 때 지식인은 비로소 진정한 지식인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세기 중반에 활동이 왕성했던 실존주의자 사르트르. 그가 지적한 ‘권한의 밖’은 무엇일까.

사르트르와 동시대의 일부를 공유했던 전설적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대학에 절실히 진학하고 싶던 농노를 매몰차게 입대시킨 아버지 이야기를 썼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근위학교 수석 졸업자에서 상호부조론을 펴는 아나키스트로 변신한 크로포트킨은 거대한 농토를 가진 귀족이었다. 계몽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접어들 무렵, 서구에서 지식인의 지위는 풀려난 노예 정도였던 모양이다. 왕의 최측근 장교로 출세할 수 있는 크로포트킨이 시베리아로 자원해 공부에 전념하자 그의 아버지는 크게 실망했는데, 크로포트킨이 대학에 들어간 농노였다면 민중의 삶을 끌어안으려는 행동가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 사르트르가 지적한 ‘권한의 밖’은 바로 크로포트킨이 보여준 그런 ‘행동’일 것이다. 지배계층의 앞잡이 행동일 리 없다.

최근 산문집 《달려라 냇물아》를 낸 소설가 최성각은 “문학이 찬탄의 대상이던 시절, 그런 시절의 문학이 제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떤 경우라도 작가는 당하는 자의 편에 서야 하고, 진실을 묵살하고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의 폭력에 저항하고 그들이 감추려는 진실을 드러내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시장원리주의가 세계를 지배한 1990년대 이후, 문학도 소비상품으로 전락했다고 안타까워하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은 《달려라 냇물아》의 추천사에서 “이 시대 주류문화의 상식에 용기 있게 맞서서 치열한 인식과 실천을 바탕으로 쓴” 최성각의 글을 ‘진정한 문학적 발언’이라고 말한다. 김종철 선생은 이 시대의 깨어있는 시인은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전통 지식인은 선비다. 선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자 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서구 지식이 지배하는 요즘은 어떤가. 반복된 문제풀이와 가혹한 과외공부로 양산되는 지식인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은 찾기 힘들다. 자본과 국가권력이 하사하는 연구용역에 충성하는 지식인은 대학과 연구소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소외받는 계층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하려는 지식인은 몹시 보기 어렵다. 자신이 연마한 지식의 깊이에 자만하며 도전에 몸서리치는 지식인은 흔하지만 타인의 지적이나 충고에 귀 기울이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땅의 21세기 지식인도 사르트르가 안타깝게 바라본 20세기 서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에 함흥질소비료 공장을 세운 자본은 미나마타에 신일본질소공장을 짓고 바다에 유기수은을 배출했다. 발작을 일으키다 죽은 고양이처럼 버둥거리다 죽는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던 질소공장 자본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드러나기 전까지 진실을 감추는데 급급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돈 몇 푼 받고 떨어지라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 뒤에는 지식인이 있었다. 어디 일본뿐이랴.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이었던 ‘검은 민들레’ 박길례 여사의 진폐증을 한사코 감추려 했던 지식인, 원진 레이온의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을 경시하려던 지식인은 없었던가. 하지만, 그 흑막을 파헤친 다른 지식인이 있었기에 늦게나마 내막은 드러났고, 같은 사례는 줄어들 수 있었다.

확인 재확인이 거듭되는 가운데, 석유자본에 예속된 지식인은 지구온난화를 집요하게 무시한다. 이른바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의 주장은 석유자본의 자금으로 집권에 성공한 정치권력에게 요긴한 논리가 되어 후손의 생존은 위협받고 있다. 가중되는 온실가스에 대해 책임져야 할 자본과 권력은 그런 지식인이 퍽이나 대견할 것이다. 생명공학과 핵관련 지식인은 어떤가. 다음세대의 생명은 안중에 있을까. 초고층 고급 아파트를 경쟁적으로 돋아 세우려는 건설업자의 뒤에서 돈벌이 방법을 알려주는 지식인은 건물이 높아질수록 그 그늘은 넓고 짙다는 걸 결코 주목하지 않는다. 대형 댐으로 강물을 막자는 지식인은 수몰 주민의 삶과 댐이 오염되거나 수명을 다한 이후의 대안에 눈을 질끈 감는다.

인천만의 사정은 아니겠으나 보자. 지역의 오랜 역사이자 문화요, 정주의식의 핵인 진산에 재벌의 골프장 건설을 표결로 의결한 도시계획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는 지식인은 어떤가. 이전 회의에서 반대를 표명하다 갑자기 찬성표를 던진 그들은 어떤 압력과 회유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의지가 박약하기만 한 건 아니다. 추악하기까지 하다. 자료를 왜곡해 위원회에 제출한 공무원이라는 지식인의 자세는 어떤가. 금권이나 감언이설로 유권자를 다시 속일 수 있다고 믿는지, 시민 앞에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선출직 공무원의 인사권이 그토록 무서웠을까. 소신을 접고 또 접다 아예 내버린 형국이다.

황우석 전 교수와 함께 쓴 2004년 논문이 취소된 어떤 생명공학자는 사석에서 “돈을 벌지 못하는 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면서 능력 없는 자의 소비를 맹비난했다. 그는 돈 있는 자의 사치에 관대할 것 같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독재의 반대는 경제성장”이라고 지적했건만, 부는 능력이고 지식은 부를 보증하던가. 더글러스 러미스에게 질문할 필요도 없다. 아담 스미스는 부가 증가할수록 빈곤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빈곤의 확산 없이 부는 증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즘 지식인은 제 머리가 남보다 뛰어나고 제 노력이 가상해서 그리 되었던가. 숱한 이웃의 피와 땀이 그를 만들어낸 거, 왜 깨닫지 못하나.

리영희 선생은 “지식인보다 지성인”을 원한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지성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학력은 지식의 깊이를 웅변하지 않는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학력위조 사건이 잘 말해주지 않던가. 지성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 과거 우리 사회가 군홧발로 억압받을 때, 지성인이 더러 있었다. 지금은 자본이 억압한다. 그것도 아주 교묘히. 그럴수록 지식인은 행동해야 한다. 다행스럽게 요즘은 스스로 공부할 수 있다. 의지에 따라 공부와 참여의 방향과 깊이를 스스로 재단할 수 있다. 함석헌 선생은 젊은이에게 ‘대듦의 아름다움’을 설파했다. 후줄근한 지식인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지식인이 그립다.
덧붙이는 글
◎ 박병상 님은 인천 도시생태ㆍ환경연구소 소장입니다.
인권오름 제 70 호 [기사입력] 2007년 09월 04일 14: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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