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있는데 거길 왜 들어가”

[시설 밖으로, 세상을 향해] 45년 만의 ‘운수 좋은 날’

배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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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있다가 집안도 기울고, 어머니도 늙고 “너 갈 데 가라” 하시더라고. 집이 평택이었는데 집 근처에 장애인들 17명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집이 있었어. 원장이 전신마비에 부인과 아이도 있었거든. 집도 가깝고 해서 거기에 들어가 2년 반 동안 살았지. 같이 살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방황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아. 그 아저씨가 어느 날 집에 불을 질렀어. 3분만 늦게 나왔어도 죽을 뻔 했지. 작은 집이라고 했지만 비닐하우스였고 도저히 거기서 살 수가 없었어. 어머니도 보고 싶고 해서 집으로 가서 살까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

삶, 자신을 포기하니 적응되더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우리 형수와 아버지가 아시는 기도원이 있다고 해서 충주에 있는 기도원에 들어가서 1년 반 동안 살았어. 밖에서 보기에 딱 50년대 건물이었고, 말이 기도원이지 소가 20마리, 개가 30마리, 알콜중독자가 80%, 정신지체가 20명이 있었던 곳이야. 나같이 중증의 뇌병변 장애를 가진 사람은 1명, 지체장애인 1명밖에 없었고. 남자 방과 여자 방이 있었는데 한 방에 60명씩 잤고 못 도망가게 문 잠가놓고 오줌통 두 개 놓고 바게스 통 앞에서 잤지. 알콜중독인 사람은 방에서 술 먹고 행패부리지, 기도원이니 3시 반에 깨워서 기도시키지, 죽고 싶었어. 알콜중독자들 그렇게 술 먹고 행패부리고 그러면 개목걸이로 묶어서 보호자가 데리러 올 때까지 묶어 놓고 그랬지.

위 사진:광진자립생활센터 활동가 배덕민 씨
머리를 감겨줄 사람이 없어서 삼 개월에 한 번씩 감았거든. 다행히 98년 7월 살러 들어온 사람 중에 좋은 사람 만나가지고 도와줘서 목욕도 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지내는 곳이었는데 물도 데워서 씻겨주고 그랬어. 먹는 것도 형편없었지. 밥이 호~ 불면 날라 갈 정도의 쌀 있잖아. 정부미라고 하나? 밥하고 김치하고 딸랑 두 개 주고, 스프 없는 라면을 끓여서 먹이고. 어떨 땐 너무 배가 고파서 개 사료도 먹고. 특식으로 돼지머리 10개 사다가 국 끓여 주고 원장이 낚시를 좋아해 향어 20마리 가져오면 국 끓여 먹이기도 했지 참. 부업으로 마늘도 깠는데, 아침 먹고 까고, 점심 먹고 까고, 저녁 먹고 까고, 돈도 못 받고 죽도록 일만했어. 그러고도 한 달에 집에서 20만원씩 시설에 내야 했고, 한 달에 한두 명씩은 죽어나갔다고. 아파서 죽고 간질로 경련하다 죽고. 제일 웃겼던 건 그렇게 열쇠 채워놓고 못 드나들게 하면서도 남녀가 눈이 맞아가지고 좋아하다가 애 배면 집에 보내는 거야. 죽은 사람을 보호자가 안 데리고 가면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고.

계속 도망가던 사람이 있었는데 도망가면 잡혀오고, 도망가면 잡혀오고 그렇게 하더니 방송국에 제보해서 취재해 갔거든. 그 시설 그 다음날 바로 폐쇄됐어. 힘들었겠다고? 처음엔 죽고 싶었지, 근데 거기서 자신을 포기하니 적응이 되기도 했어.

시설에선 나왔는데 갈 데가 없더라고

폐쇄가 되면 뭐하나. 막상 나오니 갈 데가 없더라고. 충주에 있는 "N의 집"이라는 곳엘 갔다. 그런데 거기는 정원이 100명이었는데 정원이 차서 갈수가 없는 거야. 그래도 갈 데가 없으니 임시로 그 곳에 있었는데, 원장이 보기에 내가 아파보였나 봐. 하루 종일 먹어도 배고파하고, 먹고 나면 3~4번 화장실을 가고 그랬으니 그럴 만도 하지. 오래간만에 기름기 있는 밥을 먹으니 어찌나 욕심이 생기던지. 원장이 이걸 보고 병원에 가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건대병원에 가보니 처음에는 복막염이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오진이었어. 폐결핵이더라고. 기도원에서 같이 생활하던 할아버지가 폐결핵이었는데 같이 살았지, 잘 먹지도 못했으니. 기가 막히더구만.

집에 갈 수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걸로 해서 그러니까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 걸로 해서 음성에 있는 큰 시설로 갔어. 입소하고 처음에는 좋더라고. 처음에 6개월 동안 폐결핵으로 개고기만 먹었더니 낫고. 나중엔 먹고 자고 먹고 자고, 2003년 시설장 수녀님들도 1년에 한 번 바뀌는데 그때 오셨던 수녀님이 인터넷 보고 뇌성마비 열두 명 모아놓고는 한뇌연(전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 현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가입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시설 안에 지부를 만들어서 카페도 만들고 내가 기획팀장을 맡았어. 근데 그거 하면 뭐해. 만들어지기만 했지 뭐 좀 하려면 무조건 반대하는데. 그땐 잠도 한 방에서 보통 많으면 17명씩 생활할 때였어. 워낙 일찍 깨우니까 다섯 시 반부터 일어나서 봉사자들 일 시키고. 5년 동안 내가 부반장이었거든. 가끔 돈 있는 사람들끼리 돈 모아서 술도 먹고 그랬는데 그때마다 냄새 안 나게 하려고 환기시키고, 방도 아홉 번이나 바꿔야 했어. 그 당시 K시설은 남자근무자가 없고 아줌마 근무자들이 대부분이었거든. 아줌마들이 목욕시켜주고 그래서 모멸감에 몇 번 거부도 했었는데 이해를 못하더라고. 결국 아줌마들 손에 목욕을 해야 했지. 그게 너무 답답했어. 담배를 일주일에 네 갑씩도 피웠어.

45년만의 ‘운수 좋은 날’

그러면서 그때 한뇌연에 있던 이상용 부장을 만나게 됐고, 그때 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간사랑, 박 간사도 만날 수 있었지. 마침 자립생활이 한참 얘기되고 있을 때여서 K시설에서 나와서 자립생활이랑 활동보조에 대한 이야기도 하게 됐는데 거기에 박경석 교장선생님(노들야간학교 교장)이 나온 거야. 한참 이동권투쟁 할 때였잖아. 그런 모습들 보면서 더 갈등을 많이 했지. 결국은 이 부장을 볶기 시작했어. 내보내 달라고, 조르기도 많이 졸랐지. 하하. 시설에서 하도 그러니까 나가라고 하더군. 그래서 잠깐 나와 한뇌연을 찾아가 보니 안 된다고 다음에 오라 하더라고. 그래서 다시 K시설에 갔다가 약속한 한 달 후에 가서 또다시 이 부장을 졸라서 체험홈에 들어가서 3주 동안 살았어. 체험 기간이 끝나서 K시설에 다시 들어갔는데 못살겠더라고. 그래서 K시설에 다시 들어가서 5개월 살다가 아주 자립을 하게 됐지. 전에 박 간사 있었잖아. 그때 다시 만나게 됐어. 그게 2년 전 일이네. 그렇게 연이 돼서 체험홈에서 8개월 살았고 다행히 임대아파트가 8개월 만에 나왔어. 운이 좋았지. 지금은 혼자 자립생활을 하고 있지.

형을 8년 만에 만났어. 왜 지난여름에 평택에서 장애인활동가 대회가 있었잖아. 우리 집이 원래 평택이니까 가서 만났는데. 많이 늙었더라. 조카가 13살인데 자폐증이래. 마음이 짠 하더라고. 근데 헤어질 때 되니 그러더라. 혼자 못 살 것처럼 보였는지 다시 시설 소개시켜준다 하더라고. 됐다고 했지. 집도 있는데 거길 왜 들어가.

배덕민 님은 4년 전에 자립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현재 광진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이며, 노들장애인야간학교 학생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 가을, 결혼식 빰빠라빰~
덧붙이는 글
인터뷰와 정리는 각각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활동가 김정하 님, 름달효정 님이 했습니다.
인권오름 제 108 호 [기사입력] 2008년 06월 17일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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