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③] <자료> 자살한 여중생이 시_편지 형태로 남긴 유서(1986)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서울사대부중 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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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에게

난 1등 같은 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어떤 땐 나보고 혼자 다니라고까지 하면서
두들겨 맞았다.

나에게 항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고 하는 분.
항상 나에게 친구와 사귀지 말라고
슬픈 말만 하시는 분.

그 분이 날 15년 동안 키워준 사랑스런 엄마.
너무나 모순이다, 모순.
세상은 경쟁! 경쟁! 공부! 공부!
아니 대학! 대학!
순수한 공부를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닌,
멋들어진 사각모를 위해,
잘나지도 않은 졸업장이라는 쪽지 하나 타서
고개 들고 다니려고 하는 공부.

천만 번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고,
그렇게 해놓고는 하는 짓이라고는 자기 이익만을 위해
그저 종이에다 글 하나 써서,
'모박사'라고 거들먹거리면서,
나라, 사회를 위해 눈곱만치도 힘써 주지도 않으면서
외국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 하는 따위.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 이 사회에 봉사,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것이 보람있고 행복한 거잖아.

꼭 돈 벌고, 명예가 많은 것이 행복한 게 아니잖아.
나만 그렇게 살면 뭐해?
나만 편안하면 뭐해?

매일 경쟁! 공부! 밖에 모르는 엄마.
그 밑에서 썩어들어가는 내 심정을
한 번 생각해 보았읍니까?

난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밟히다, 밟히다 내 소중한 내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떤다.

하지만 사랑하는 우리 엄마이기 때문에......
아, 차라리 미워지면 좋으련만,
난 악의 구렁텅이로 자꾸만 빠져들어가는
엄마를 구해야만 한다.
내 동생들도 방황에서 꺼내줘야 한다.
난 그것을 해야만 해. 그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순위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

"전교 ○등, 반에서 ○등,
넌 떨어지면 안 된다.
선생님들이 널 본다.
수업시간에 넌 항상 가만히 있어야 한다.
넌 공부 잘하는 학생이니까 장난도 치지 마라.
다음번에 ○등 해라.
왜 떨어졌어?
친구 사귀지 마.
공부해!
엄마 소원성취 좀 해 줘.
전교 1등 좀 해라.
서울대학교 들어간 딸 좀 가져보자.
그렇게 한가하게 음악 들을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공부해"

매일 엄마가 하시는 말씀들.
자기가 뭔데 내 친구 편지를 자기가 읽는 거야.
그리고 왜 찢는 거야.
난 사람도 아닌가?
내 친구들은 뭐, 다 못난 거야?
그리고 왜 약한 사람을 괴롭혀?
돈! 돈! 그게 뭐야.
그게 뭔데 왜 그렇게 인간을 괴롭히는 거야.

난 눈이 오면 한껏 나가 놀고 싶고,
난 딱딱한 공해보다는 자연이 좋아.
산이 좋고, 바다가 좋고......
하긴 지금 눈이 와도 못 나가는 걸.
동생들도 그러하고......
너무 자꾸 한탄만 했지, 그치?

졸업하면 나는 아예 그 먼 고등학교에 가서는
집에 갇혀서 죽도록 공부만 해야 될 것이다(으, 끔찍하다).
난 나의 죽음이 결코 남에게
슬픔만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것만 주는 헛된 것이라면,
난 가지 않을 거야.

비록 겉으로는 슬픔을 줄지는 몰라도,
난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줄 자신을 가지고
그것을 신에게 기도한다.

- 1986년 1월 15일 새벽에
인권오름 제 10 호 [기사입력] 2006년 06월 27일 2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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