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의 인권이야기] 우리가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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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추석 연휴 직전, 한 대학교 구내식당 조리실에서 환풍기가 고장 났다. 일단 시설과에 수리를 요청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자꾸만 가스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어지러웠다. 가슴이 울렁거리거나 속이 메스껍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일은 해야지’ 했던 노동자들은 일하다 심하게 어지럽거나 힘들면 돌아가면서 나가 바람을 쐬고 다시 조리실로 들어오길 반복하며 일했다.
다른 업무가 바쁘다고 환풍기 수리가 당일에 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공교롭게 연휴가 시작되어 수리는 더 지연됐다. 결국 연휴가 끝난 3일 뒤까지 환풍기는 고쳐지지 않았다. 집에서 쉬면서 몸이 좀 나았던 노동자 중 한 명이 결국, 연휴 끝난 뒤 근무하다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고 말았다. 일산화탄소 중독 진단을 받았다. 식당과 학교 측이 환풍기 고장을 방치해서 발생한 산업재해다.
이 학교 식당 조리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도 속해 있었는데, 조합원들이 노조에서 활동하는 노무사를 찾아와 이때 얘기를 하면서 ‘죽을 뻔했다, 큰일 날 뻔했다’고 무용담처럼 털어놓았다고 한다. ‘아니 왜 그 지경인데 일을 멈추고 환풍기 고치기를 기다리지 않았어요?’ 묻는 활동가에게 조합원들은 그래도 되냐고 되물었다. 이전까지 책에서나 보던 ‘작업중지권’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이 얘기를 들으면서 실감했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또는 중대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사업주가 작업을 중지시키고 노동자를 대피시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산업재해가 발생할 위험이 있을 때 작업을 중지하고 피신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고, 이걸 작업중지권이라고 부른다. 작업중지권이라고 하면 조선소나 건설현장, 제철소같이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위험한’ 현장에서, 천장에서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거나 건축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재래형 사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작업중지권은 대학식당 환풍기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험에 대해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이다.

말하자면, 사례의 식당 노동자들이 ‘환풍기 고쳐줄 때까지는 일 못 한다. 어지럽고 메스껍다. 한두 명이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 다 그런데, 어떻게 일하라는 거냐?’ 따지고, 더 나아가 ‘환풍기가 고장 난다고 이렇게 바로 일하기 힘들 정도의 조리실 환경이 일하기 적절한 환경이 맞냐?’ 묻고, 아니라면 ‘대책은 뭐냐, 식당이나 대학에서는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거냐?’ 토론하는 과정 전체가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에 수반되는 과정이다. 물론 이상적이다. 쉽지 않다. 따져 묻고 토론하기는커녕, 환풍기 고쳐줄 때까지 일 못 한다는 소극적인 업무 중단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작업중지권을 얘기하면 ‘에이, 직장에서 어떻게 그렇게 하냐?’는 반응이 많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반대로 이건 법으로 굳이 정해둘 필요조차 없고, 권리라고 말하기조차 면구스러운 반응이기도 하지 않은가. 아니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데, 계속 일을 하는 게 정상인가? 일을 멈추고 대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이럴 때 대피한다는 것이 꼭 법에 보장된 권리여야 하나?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반응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도 회사들은 노동자가 위험을 감지하고 작업을 멈추면 그게 정말 급박한 위험이었냐고 시비를 건다. 예전에는 사고 위험이 있으면 노동조합 대의원이 작업 중지하고 대책 회의를 하는 것이 관례였던 회사가 이젠 슬그머니 이런 활동가들을 업무 방해나 손해배상으로 고소한다. 정말 급박한 순간에 작업을 중지했냐는 것이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아예 사람이 다쳐야만 ‘안전사고’이며, 안전사고인 경우에만 작업을 멈출 수 있다고 우긴다. 사람이 다친 뒤에는 작업을 멈출 수도 있지만, 다칠 뻔한 것 가지고 일을 멈춰 생산에 차질을 주고 이윤에 손해를 입히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사고 발생 후에 작업을 멈추는 것도 필요하다. 사고 처리를 위해서 뿐 아니라, 남아 있는 위험 때문에 추가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막는다든지, 크고 위중한 사고의 경우 원인에 대해서 현장 노동자들과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작업중지권은 사고가 나기 전에 위험을 발견한 노동자가 일을 중단해서 사고를 방지해야 그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다치기 전에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작업중지권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작업중지 건으로 진행되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한 회사 관리자는 판사가 ‘만약에 라인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팔이 잘렸다. 그러면 라인이 서야 되냐, 안 서야 되냐’ 물었더니 ‘그때도 안 세워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안 세울 수 있으면 최대한 안 세우는 것, 생산에는 차질이 가지 않는 것, 그것만이 그들의 관심사다. 노동자의 부상, 질병, 불편함과 불건강은 자본 입장에서는 ‘부수적 피해’인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의 손상을 ‘부수적 피해’ 정도로 생각하는 일터에서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한다는 것은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몸과 삶을 기준으로 일터를 통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자 건강권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이 노동 개악을 막기 위한 싸움,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활동과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최민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이며 직업환경의학전문의입니다.
인권오름 제 466 호 [기사입력] 2015년 12월 09일 13: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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