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구_창]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의 접근

인권과 환경의 상호의존성의 인식에서 출발해야

류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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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3세대 인권 또는 연대권이라 불리는 권리에는 ‘환경권’이 속한다.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직면하여 환경에 대한 관심과 불안이 커가는 지금, ‘환경권’은 당연한 인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환경권’에 대한 선호와 열망은 당연할지 모르나 ‘환경권’에 대한 정의나 기준은 당연하다고 할 수 없다.

인권과 환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의 접근을 다룬 시각들을 살펴본다.(출처 Alan Boyle 외, Human Rights Approaches to Environmental Protection, 1997, Oxford)

인권과 환경간의 긴장

환경운동과 인권운동 간에는 긴장이 있다. 환경운동은 다른 종이나 생태계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다는 이유로 인권에 대한 불신을 가질 수 있다. 만약에 기존에 인권으로 인정된 권리들, 가령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이 ‘절제’된 수준이 아닌 ‘부’를 추구하는 속에서 세계인구의 다수에게 실현된다면 그 결과는 자연자원의 급속한 고갈일 것이다. 따라서 늘어나는 인구를 위해 인권을 실현하는 것과 한정된 환경자원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것 간에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인권운동은 생태계, 유한한 자연자원, 미래 세대의 기본적 필요를 보호하려는 환경운동의 추구가 때로는 긴급하고 절실한 인간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다. 흔히 인권과 환경의 상호의존성, 불가분성을 원칙으로 내세우지만, 이런 원칙의 주장은 현실에서 직면하는 어려운 문제를 일시적으로 가리려는 도덕적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환경문제를 인권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성과 장점이 있는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환경권을 운운하는 것인가?

환경에 대한 인권은 필요한가?

먼저 검토돼야 할 전제가 있다. 첫째, 뭔가를 선호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즉 깨끗한 환경을 원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도덕적 또는 법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둘째, 권리로 말하는 것을 도덕과 동의어로 취급하는 것도 문제다. 권리 언어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어떤 행동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은 가능하다. 깨끗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다 할지라도 그러한 추구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일 수 있다. 즉 깨끗한 환경, 건강한 환경 내지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권’의 접근방식을 취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 대한 입장이 대립될 때, 우리가 선호하는 것이 권리로서 인정받는다면 그 균형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상호 선호하는 것이 대립할 때, 어느 한쪽도 힘으로 바라는 바를 강요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서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반면에 어떤 선호가 권리와 대립할 때, 그 권리의 소유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카드를 쥐게 된다.

권리와 도덕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리는 도덕의 전체는 아니지만 그 일부이다. 우리가 깨끗한 환경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고 하면 환경정책의 도덕적 성격에 관한 어떤 논의에서도 우리의 그 권리는 고려돼야만 한다. 이 권리는 기타의 선호되는 것들이나 비도덕적 고려들보다 먼저 고려돼야 한다. 도덕적 권리로 유력한 것은 법적 권리가 되기에도 아주 유력하다. 따라서 헌법이나 국제인권법에 규정된 환경권을 갖는다는 것이 이 권리와 관련된 모든 논쟁에서 권리소유자가 승리할 것을 보장하지는 않더라도 확실히 그 권리가 고려될 뿐 아니라 그 권리를 부인하기 위해서 상당한 이유가 요구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권리는 도덕적 및 법적 주장에서 다른 개념을 이용해서는 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를 갖는다.

기존의 인권을 동원

인권개념이 환경보호에 유효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 중 하나는 기존에 확립된 인권을 동원하는 접근이다. 기존의 국제인권법이나 국가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인권규범이 실현된다면 충분하다는 시각이다. 새로운 환경권을 만드는 것은 잘해봤자 과잉이고, 잘못하면 비생산적이라는 입장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데 힘을 들이기보다는 기존 인권기준의 효과적인 이행을 위한 운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존의 인권에는 우선 시민·정치적 권리가 있다.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데 이 권리의 중요성이 있다. 생명권, 결사권, 표현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권리, 평등,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등의 실현은 환경파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가능하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 심각한 환경 파괴에는 인권 및 환경 옹호자들에 대한 억압과 정보접근권에 대한 거부가 동반된다. 억압과 공포에 의한 재갈 물리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정치적 권리는 참여의 보장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인간 복지의 기준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건강권,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은 직접적으로 환경에 관한 조건을 담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건강권은 해로운 환경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조치를 취할 의무를 요구한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구상된 정책은 또한 그 결과로서 여타의 식물군, 동물군 및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다. 방사성물질에 대한 노출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비인간 종을 더불어 보호하는 것이 그 예다. 또 다른 예로 교육권은 환경인식의 향상이나 취약집단이 생태적 파괴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정치 투쟁에 필요한 기술무장에 기여한다. 또한 문화권의 침해가 환경파괴를 동반할 수 있다. 문화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적절하게 보호된다면 그런 문화가 기반하고 있는 물리적 환경도 보호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존의 권리체계는 다소 협소하게 환경권을 구성하며, 환경문제에 단지 간접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기존 인권을 재해석

기존권리를 단순 동원하는 것으로는 환경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기존의 인권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환경문제가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권리를 상상력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등권은 환경에 대한 동등한 접근과 보호의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 환경파괴에 대한 노출의 불평등성은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결과이다. 부와 빈곤은 상이한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때로 ‘부’의 문제만이 국가정책에서 다뤄진다. 평등권은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는 환경피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낼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명권은 건강한 환경, 오염 없는 환경, 생태적 균형이 국가에 의해 보장되는 환경에서 살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재해석돼야 한다.

환경보호에 대한 새로운 인권이 필요

그러나 기존의 인권기준은 긴급한 환경적 과제에는 모호하고 불편한 도구이기 때문에 환경과 직접 연관되는 포괄적인 규범이 요구된다는 입장도 있다. 이런 접근에는 두 가지 입장이 갈린다. 새로운 환경권이 바람직하다 할지라도 주로 절차적 성격에 초점을 두느냐, 실체적 권리의 내용에 초점을 두느냐이다.

절차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절차가 수천개의 비현실적인 원칙의 선언보다 가치가 있다고 본다. 환경권과 관련 있는 절차적 권리의 범주에는 환경 위험에 대해 사전에 알 권리를 포함하는 정보에 대한 권리, 환경문제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권리,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공익소송을 용이하게 하는 제소권의 확대 등이 포함된다.

절차적 또는 참여적 접근은 환경보호를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정보에 입각한 논쟁을 통해 보장하자는 것이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이끈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 근거는 환경에 대한 의사결정자와 그 결정의 대가를 지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일치한다면 환경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환경의 질은 법률 용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가치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에 실체적 권리 규정보다는 사람들이 개방적이고 철저한 논쟁을 할 수 있는 절차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절차적 권리에 대해 회의적이다. 절차적 권리가 완전히 실현된다 할지라도, 그에 부응하는 정치조직은 장기간의 환경보호보다는 단기간의 부를 추구하기 쉽다.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환경파괴를 할 수도 있고 구조적으로 자유로운 소비를 하기 쉽다. 북반구의 자유주의적 권리에 기반한 체제는 환경파괴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절차만으로는 환경보호를 보장할 수 없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는 환경문제에 대한 지지를 정의하고 동원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것은 아니다. 환경권을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련된 기존의 헌법과 법률에 대한 조사에서는 ‘깨끗한’, “건강한”, “존엄한”, “생존가능한”, “만족할만한”, “생태적으로 균형잡힌”, “지속가능한”, “오염이 없는”, “인간의 발전에 적합한” 등 다양한 형용사가 환경에 덧붙여 있다. 환경보호가 인간의 건강과 생존을 보호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태계의 모든 종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 지속가능성을 보호하는가, 좋은 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등 쉽사리 법적 용어로 옮겨질 수 없는 차원의 문제들이 정의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혼란에서 벗어나오는 한 가지 방법은 특정 맥락 속에서 무엇이 정확하게 권리의 침해를 구성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사법상의 의무와 관련되는 것으로 사회적 행위자들이 정확한 의무를 예상할 수 있도록 하는 한에서는 상세한 문맥상의 정의가 도움이 된다. 여기에는 오염자 지불 원칙, 예방 원칙, 환경영향평가, 토지개발의 용도와 명백히 관련된 환경권 등이 포함된다.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문제

어떤 인권이든 본질적으로 지구 생태계의 여타의 종을 배제하고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아무리 환경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크게 품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기본은 ‘인’권이며, 인간이 아닌 종 또는 자연자원에 부여된 권리와는 매우 다르다. 인간의 복지를 보존하고 배양하는데 필수적인 환경보호의 요소들을 포함하기 위해 생명권을 확대한다고 할 때, 자연환경의 구성요소들은 분명히 인간의 목적을 위해 도구적 수단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본질적으로 도구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환경인식을 강화하는 것이 인간의 복지에 초점을 둘 수는 있지만 또한 비인간 종에 대한 관심과 더 깊은 생태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따라서 타 생물종의 본질적인 가치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비도구적 방식으로 환경권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중심적인 권리의 성격을 없앨 수는 없다 할지라도 줄일 수는 있다. 인권의 인간중심주의는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문제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복지에 기초한 권리 제안보다는 ‘생태적 균형’(ecological balance)을 위한 권리 제안이 덜 인간중심적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권체계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일 수밖에 없다. 동물권, 나아가 식물의 권리, 생태과정에까지 권리를 부여한다고 할 때 결정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인간이 권리를 동물이나 산에게 부여한다고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런 권리 인정의 행위는 여전히 인간이 인식하고 집행하는 것이고, 권리는 오직 인간에 의해 이행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법률 시스템에 불가피하게 동반되는 구조적인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대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주로 이론의 영역에서만 작동한다. 정책적 고려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모든 종을 위해 지구적 환경보호를 강화해야할 실제적 문제를 견뎌낼 수 있을까? 권리를 자연세계에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 모든 생물체의 본질적 가치를 실제적으로 보호하는 데 적절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인권을 해석하고 행사하는데 있어서 생태계의 본질적 가치를 고려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부터 인간이 아닌 모든 생물과 생태계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기초할 때 인권적 접근은 인간중심주의적 접근법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인권적 접근의 손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적 접근의 유용성을 앞서 살펴봤다면 이에 대한 우려와 반론도 다양하다. 몇가지 주장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권리 용어와 체계는 환경문제의 바탕이 되는 정치경제적 문제와 관계를 다룰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여기에는 기술적 선택, 생산양식, 사회적 생산물의 배분양식 등이 포함되는데 현재의 권리라는 것은 단지 이것들의 증상을 겨냥하는 권리일 뿐으로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실 물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설사약을 처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환경권의 주창이 단지 상징적인 몸짓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또는 단지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을 심어주는 완화제 수준이라면 환경파괴는 크게 줄지 않으면서 사실상 환경파괴의 구조적 원인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만들 수 있다. 환경파괴를 야기하는 사회경제적 힘에 직접적으로 맞닥뜨리지 않으면서 환경피해에 반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거의 효력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단순한 권리 용어로서 복잡하고 기술적인 환경운영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있다. 환경보호에는 의사결정과정에서나 그 이행에서나 고도로 기술적인 설명과 평가가 요구되는데 이런 문제를 단순한 권리의 언어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인권법보다는 환경법들이 더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권리의 오용 가능성도 크다. 권리, 특히 절차적 권리는 부유한 집단이나 겉치레 환경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적인 생활의 질을 보호하기 위해 이용하기 쉽다. 이로 인해 미래의 환경비용을 현재 불리하고 취약한 집단에 떠넘길 수 있고, 이런 취약한 집단과 공동체가 오히려 빈곤이나 제도적 장치의 부족으로 절차적 권리에 접근하기 어렵다.

유엔의 인권과 환경에 대한 소위원회에서는 1994년 인권과 환경간의 관계를 탐색하면서 인권과 환경에 관한 원칙의 채택을 제안했다. 그 제일 원칙은 인권, 생태적으로 건전한 환경, 지속가능한 발전과 평화는 상호의존하며 불가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인권과 환경의 관계는 여타의 고려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으뜸이라고 주장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을 어떻게 정의하며 실천해 가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인권오름 제 51 호 [기사입력] 2007년 04월 24일 23: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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