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1] 국제인권규범의 눈으로 본 차별금지법안

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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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분도 없이,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조)

역사적으로 인권운동은 인권을 보편화하는 투쟁 속에서 발전해왔다. 근대시민혁명에서 인권의 주체는 재산 있는 성인 남성일 뿐 그 외 인간은 ‘인간’의 범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의 역사는 인권의 주체가 확장된 역사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온갖 차별과 불평등한 관계, 편견과 낙인의 오명 속에서 생명의 끈을 이어온 그/그녀들(여성, 어린이청소년, 장애인, 동성애자, 성전환자 등)은 이제 나도 인간이고 인권의 주체라고 외치고 있다. 인권은 ‘진공 상태’와 같은 무색무취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권력과 위계화된 관계 속에서 인권이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는 ‘비차별’ 감수성과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위 사진:성소수자들이 11월 11일 청계2가에서 개최한 '차별없는 세상을 여는 무지개 만들기' 행사 [출처] 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 차별저지를 위한 긴급 공동행동(www.lgbtact.org)


국제인권규범에 등장한 비차별

국제인권규범에서 ‘비차별’은 유엔헌장 전문, 1조(3), 55조와 세계인권선언 2조, 7조로부터 출발한다. 잔혹하고 끔찍한 집단학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등과 같은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인권침해를 경함한 인류는 더 이상의 잔혹극은 볼 수 없다며 전 인류의 보편선언으로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한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류와 국가가 달성해야 할 공통기준으로 최소공약수와 같다. 선언의 비차별 조항은 2조로 위치 지워지며 이후 유엔이 제정하는 각종 인권규범에 주요하게 자리 잡는다. 이렇듯 비차별 조항이 유엔 인권규범의 중심적인 위치가 된 배경에는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인권침해의 근본원인에 차별과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특히 사회적 취약집단은 일상에서 또는 비상시기에 그들이 갖고 있는 특질과 특성으로 인한 차별로 사회적인 배제와 인권침해에 노출되어 왔기 때문이다.

비차별 사유로 세계인권선언 제2조는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지위 등”을 명시하고 있다. 인종(race)과 피부색(colour)을 비차별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인종차별정책이 광범위하고 구조적인 인권침해를 가져온다는 현실에 주목한 결과이다. 성(sex)을 비차별 근거로 제시한 것은 남녀가 차별 없이 평등하게 권리를 향유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언어(language), 종교(religion)를 비차별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소수민족의 언어나 문화 또는 종교에 대한 비차별을 위해서이며,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political or other opinion),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national or social origin)에 기인하는 비차별은 지난날 갖가지 박해와 차별대우가 의견, 신분의 차이나 출신을 이유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외 재산(property),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birth or other status)을 비차별 근거로 제시한 것은 이로 인한 차별이 노동, 건강, 교육, 주거 등의 권리를 향유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배제를 낳는 결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점차 가시화되는 비차별 사유들

세계인권선언 2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비차별 근거는 지금 시각에서 보면 완전하지 않다. 사회와 환경이 변화하자 새로운 유형의 차별이 등장하기도 했고, 당시에는 가시화되지 못했던 영역들이 가시화됨에 따라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 나이(age), 빈곤(poverty), 장애(disability), 국적(nationality), 건강(health), 종족, 결혼 여부, 난민 또는 이주 지위’ 등 비차별 근거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00년 사회권위원회는 일반논평14 ‘도달 가능한 최고수준의 건강에 대한 권리’에서 세계인권선언, 사회권규약 2조 2항에 있는 비차별 근거를 포함해 ‘출생,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 건강상태(HIV/AIDS 포함), 성적 지향, 시민적 정치적 사회적 또는 기타의 지위’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비차별 근거는 열거(exhaustive)된 것만 인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외에도 사회·정의적 차원에서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시적(illustrative)인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과정에서 법무부가 삭제한 비차별 사유 7가지는 국제적인 인권규범에 비추어보면 매우 제한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법무부는 비차별 사유가 예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애초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기준을 입법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삭제한 저의는 현행 제도와 관행에서 수용되지 못하는 비사별 사유는 배제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비차별 조항은 1966년 자유권규약 2조 1항, 7조, 사회권규약 2조 1항에서 재확인된다. 또한 1966년 인종차별철폐협약, 1979년 여성차별철폐협약, 1980년 어린이청소년권리협약, 1990년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협약, 2006년 장애인권리협약에 이르기까지 차별의 피해자로 여겼던 여성, 인종적 소수자, 이주노동자, 어린이청소년, 장애인 등이 독자적인 인권규범의 주체로 나선다. 권리의 주체로 서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관련 분야의 국제인권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국제인권규범의 바깥에 아직 차별받고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비가시화 된 주체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이들이 인권의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과거부터 존재했고, 현재도 진행 중인 차별을 차별이라고 이름 붙여 말하고, 보여주고, 기억해야 하는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환기해야 한다.

위 사진:성소수자들이 11월 11일 청계2가에서 법무부 차별금지법안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출처] 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 차별저지를 위한 긴급 공동행동(www.lgbtact.org)


비차별에 부과된 다양한 국가의무

촘촘한 인권보장의 그물망이 되기 위한 비차별 규범은 국가에게 다양한 형태의 의무를 요구한다. 비차별은 단지 차별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구조화된 차별적인 법제와 관행을 제거하고, 내면화된 차별의식과 괴롭힘을 차별로 인식하면서 이를 근절할 수 있는 예방교육과 홍보를 집행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출발부터가 다른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조건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차별적인 처우를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그 동안 누적된 불평등한 상황을 바꾸기에 역부족이다. 따라서 차별행위를 제거하는 조치 외에도 차별을 일으키거나 부추기는 조건들을 줄이거나 제거하기 위하여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가 필요하다.

낮은 수준에서 ‘적극적 조치’는 국가가 취약집단에게 자문이나 훈련, 주거, 식량 같은 특별한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가 및 지자체는 공공역사를 중심으로 노숙인에게 임시 쉼터를 제공해 위급한 상황에서 이들의 건강, 주거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 혹은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과 어린이·청소년에게 저렴하거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제공해서 폭력적인 상황으로부터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고려해볼 수 있다. 또한 국가는 이들에게 심리상담을 제공해 손상된 마음을 치유할 수 있게 하고, 독립적인 삶을 위해 직업훈련이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적극적 조치’는 공공고용이나 교육, 훈련 등에서 할당제(quota system)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할당제는 수적인 대표성의 비율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취약집단의 경제·사회·문화적 재화와 교육, 훈련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임대주택 쿼터제는 자치구 내 총 주택의 일정비율을 임대주택으로 확보해 취약집단에게 우선 공급하는 제도이다. 임대주택 쿼터제는 빈곤선 이하에 놓여있는 사람들, 빈곤한 장애인, 여성, 노인, 어린이·청소년이 경제력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주거권을 향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장애인 고용할당제의 경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에게 일정 비율로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고용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2%대의 낮은 의무고용률을 고집하고 있는 반면, 독일은 20인 이상 고용 사업주에게 5%, 프랑스는 6%, 이탈리아는 35인 이상 고용주에게 7%의 의무고용률을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할당제는 수적으로 대표될 수 없는 비가시 영역의 사회적 소수자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그 외 차별을 예방하고 구제하기 위한 조치로는 징벌적 손해배상청구, 집단소송제, 입증책임의 전환 등과 같은 실효적인 방법이 있다. 특히 교육과 홍보를 통해 비차별 의식을 확산하고, 편견을 교정하는 과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제도화를 넘어 ‘운동’으로서 차별금지법 제정

2006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차별금지법안에는 차별의 구제와 관련해 시정명령권, 이행강제금, 손해배상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법안에는 핵심적인 권고안이 모두 삭제됐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조용히 이 상황을 보내고 싶었던 국가인권위원회는 법무부의 작태에 관해서 별다른 공식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없는 것 보다는 나으니 현행법체계에서 수용될 만한 수준의 내용을 중심으로 슬그머니 입법을 추진하자 드디어 당사자들이 나섰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차별금지법을 권고한 이후 사실 법무부의 행동은 위로부터의 입법 활동이라고 할 만하다. 단 한차례 공청회를 개최하면서 기껏 이해관련자의 의견을 듣는 과정은 보수 기독교계와 재계의 압박에 못 이겨 그들의 손을 들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법무부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차별받고 있는 당사자의 경험은 뒤로 한 채 편견 앞에 무릎 꿇고, 효율에 눈 감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누구보다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주체들이 모여 그들의 경험과 실천 속에서 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고, 차별을 예방하고 구제하기 위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 논의하는 것은 기뻐할 일이다. 차별금지법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 출발했으나 그 제정 과정은 차별을 경험하는 당사자의 주체화를 통해 완성될 것이다. 또한 입법운동 그 자체는 교육과 홍보의 과정으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이 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정말 최소한의 단계이며, 오히려 입법과정에서 차별당사자들이 경험하는 차별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비차별 감수성을 확산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커다란 교육과 홍보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소수자의 경험에서 풍부하게 정의되는 인권개념은 액자화된 인권규범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렇듯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은 보편적인 인권이 ‘문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해방에 실재하는 역사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자신들만의 해방에 갇히지 않고 모든 이의 해방을 위해 성취되는 보편성은 사회적 소수자에게 이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하고 그 정체성으로 인해 다시금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인권오름 제 81 호 [기사입력] 2007년 11월 28일 14: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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