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2] 모든 이들의 해방을 기획하는 ‘진보’의 진보로

반차별운동의 의미를 통해 본 진보운동 비판과 과제

박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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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학벌, 여성, 장애인, 외국인, 비정규직 등을 5대 차별사유로 정하고 이에 대한 차별 해소를 위해 국가차별시정위원회를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최근 법무부는 ‘차별금지법안’(아래 법무부안)을 입법예고했으나 보수 기독교계와 재계의 반대에 부딪혀 기존 20개의 차별 사유에서 성적 지향, 출신국가, 학력 등 7개 사유가 삭제된 ‘누더기 차별금지법’을 확정하고 말았다. 원 법무부안에서 삭제된 차별 사유들은 ‘삭제되었기 때문에 차별해도 된다’고 하는 인식을 낳음으로써 차별금지법이 오히려 차별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법무부안은 차별 피해에 대한 신속한 구제를 위한 시정명령권과 악의적 차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가해자에게 차별 무혐의를 입증하도록 한 입증책임전환제 등을 모두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차별금지법 시행의 실효성에 있어서도 비판을 받아 왔다.

법무부안의 차별 사유 삭제를 계기로 성소수자인권운동진영은 ‘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차별 저지를 위한 긴급 공동행동’을 조직해 즉각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주노동자·보건의료·교육·장애인 등의 인권사회단체들도 성소수자인권단체들과 함께 차별금지법 공동 대응에 나서며 반차별운동으로 나아갈 것을 모색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회단체들이 차별금지법의 공동 대응에 나서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차별 현실에서 기인한다. 법무부안에 명시된 성별, 장애, 인종, ‘용모 등 신체조건’ 등에 따른 차별뿐만 아니라 법무부안에서 삭제된 성적 지향, 출신국가, 학력, 병력 등에 따른 사회적 차별 역시 심각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권고한 차별금지법안은 차별 사유로 ‘고용 형태’도 포함하고 있어 비정규직 등과 같은 고용 형태에 따른 차별 역시 다룰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차별은 여성,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과 같은 특정 집단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차별적인 대중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차별당한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위 사진:지난 8일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출처] 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 차별저지를 위한 긴급 공동행동(www.lgbtact.org)


반차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는 ‘주류’ 진보운동

차별은 평등을 해치는 심각한 인권침해이자 사회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노동운동 등과 같은 기존 주류 진보운동은 차별금지법 대응을 비롯한 반차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정치·철학적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은 ‘소수자운동’(만)의 과제라는 인식이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차별에 대한 저항은 체제 내에서의 평등에만 한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소수자운동’ 그 자체가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서 필연적으로 체제 내적인 운동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평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동안 기존 주류 진보운동과 이른바 ‘소수자운동’ 사이의 긴장관계를 떠올려 볼 때 지금의 상황이 그리 낯선 상황이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체제 및 사회구조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는 구조적 차별

이러한 상황은 반차별운동과 ‘소수자운동’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차별은 작용 방식을 기준으로 세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개인적 차별, 특정한 조직의 정책 또는 구성원이 제도적으로 가하는 제도적 차별,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중립적인 제도가 사회 구조적인 모순으로 차별을 유발하는 구조적 차별이 그것이다. 개인적 차별은 피해 당사자가 비교적 명확하게 차별을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또 제도적 차별은 대부분 명문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명확하지만 문제는 구조적 차별이다. 구조적 차별은 차별 사실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차별의 가해자도 불분명할뿐더러 워낙 고정관념 혹은 관습으로 굳어있기 때문에 피해자도 차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대형 건물이나 전철역사 등과 같은 공공시설의 청소노동자나 서비스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하지만 경찰, 소방관, 정치인 등은 남성의 비율이 현격히 높다. 굳이 채용 기준에서 ‘성별’을 제한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성별에 따라 고정된 차별적 역할이 암암리에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차별적인 구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차별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거나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구조적 차별은 대상과 피해가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작용 방식에 따라 차별이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긴 하지만, 개인적·제도적·구조적 차별은 서로 연관되어 작동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은 ‘비효율적인 노동력’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특성에 기인해 ‘장애인은 무능력자’라는 편견이 만들어지고 그러한 편견은 구조적인 차별을 낳는다. 그리고 구조적인 차별은 제도적인 차별로 공고화되고,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무시로서 개인적 차별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것은 항상 순차적인 과정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선후가 바뀔 수 있는 포괄적인 과정이다.

반차별운동의 두 가지 의미

따라서 차별은 체제 및 권력구조 등과 밀접하게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고, 고정관념이나 편견 등의 형태로 우리 삶과 인식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누구도 차별에서 완전히 예외일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이러한 두 가지 맥락에서 차별에 저항하는 반차별운동 역시 두 가지로 의미를 정리해볼 수 있다.

반차별운동의 첫 번째 의미는, 반차별운동이 자본주의 체제와 그에 따른 권력구조에 저항하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차별은 자본주의 체제 및 권력구조 등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체제에서 기인하는 구조적 차별을 넘어서는 평등은 체제 내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은 비록 소수이지만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배계급의 사상과 생각을 ‘모든 사람의 것’으로 일반화시킨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고정관념으로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차별적인 편견의 잣대를 통해 배제한다. 이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기득권층과 주변계층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러한 계층 구분의 사유들은 상당 부분 자본주의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남/여,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차별의 형태로 드러나는 ‘대공장 남성 정규직 노동자/서비스업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문제와 가부장제·젠더의 문제가 융합되어 있는 형태다. 자본주의적 특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차별들도 있기는 하지만, 여성/장애인/이주노동자/저학력 노동자/범죄 및 보호처분 전력자 등과 같은 ‘차별 사유’의 주체들은 자본주의에서 주변화된 노동자의 대표적인 범주에 속한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등과 같은 사회적 모순들은 서로 융합되어 기득권의 이해에 기반해 ‘동일한 기준’을 만들어냄으로써 끊임없이 배제와 차별을 낳고 그 결과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을 낳는다. 그리고 그 기준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층인 ‘아시아인종 한국인’은 서구에서는 ‘소수인종 제3세계 출신인’일 뿐이다. 또 남성 정규직 노동자는 사용자와의 관계에서는 소수자이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관계에서는 기득권층에 속하고 가정에서는 가부장제 질서 속에 있는 가부장이다. 여성 동성애자인 레즈비언은 ‘여성’이자 ‘성소수자’로서 이중의 억압 속에 있다. 이러한 이중의 차별은 아웃팅(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성소수자임이 알려지는 것)의 일상적인 위험과 주변적인 노동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에 노출될 가능성을 훨씬 높게 하고 노동 조건 역시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두 번째 의미는, 차별을 통해 다양하게 정체화하고 있는 ‘소수자’들의 경험이 반차별운동을 통해 일반화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차별을 없애나감과 동시에 모든 사람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기획할 수 있는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진보’의 내용은 ‘누구에 의해 정의된 진보냐’는 시선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 가령 인권영화제는 장애인의 접근권을 고려하지 못한 채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진행되어오다가 몇 년 전부터 장애인 접근권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우 분명 ‘인권’은 ‘모든 사람’의 권리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인권영화제의 ‘인권’에서 장애인은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진보’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다. ‘진보’는 일반적으로 자본과 권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볼 수 있으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저항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이전 진보운동은 저항의 주체를 동질적으로 ‘가정’(사실은 ‘확신’)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주체‘들’은 동질적이지 않았다. 동질적이지 않은 주체들은 이전에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도 못하다가 ‘소수자운동’이 가시화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장애인권운동을 통해 장애인들이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었고, 성소수자운동을 통해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과 같은 성소수자들이 가시화되었다. 여성인권운동의 역사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오래 되고 깊다.

열린 연대를 만들어갈 ‘소수자운동’의 가능성

이러한 시선의 차이, 그리고 진보의 ‘구조’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진보’ 역시 또 다른 억압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실제로 ‘진보’ 내부의 이러한 억압은 운동의 연대를 가로막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해악성이 심각하다. 얼마 전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의 기관지인 『민족의 진로』에 실린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외국인노동자’, 국제결혼 이주여성,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진보’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에 근거해 대화를 시도했던 동성애자인권연대 등 성소수자인권단체들과 인권단체연석회의는 범민련 남측본부의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결국 범민련 남측본부와의 연대 단절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구조에 저항하는 다른 주체가 존재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보’운동이 어떻게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해방’을 약속할 수 있을까.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소수자를 “고통을 피할 순 없었지만, 오히려 그 고통으로 인해 그게 없었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을 보고 들을 수 없었을 것을 듣는 존재, 그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는 존재, 또한 그 기쁨도 이해할 수 있게 된 존재, 자신 아닌 수많은 타자들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게 된 존재, 자신과 다른 타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촉발할 수 있게 된 존재”라고 정의했다. ‘소수자’들의 ‘다른’ 경험은 현재로서는 차별의 원인이 되고 있지만, 반차별운동을 통해 그 경험이 일반화될 때 사회적 차별은 점차 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해방을 약속하는 진정한 진보운동의 광범위한 연대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진경 교수의 말처럼 모든 ‘소수자’가 자신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도 저절로 자연스럽게 연대할 수 있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 지점에 개입하는 반차별운동의 과정이 ‘소수자’의 열린 연대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이후 국가권력의 통치 전략은 점차 교묘해지고 있다. 이전 국가권력의 통치 전략이 ‘가시적인 인권 탄압을 통한 직접적인 국민 통제’였다면, 지금은 ‘비가시적인 인권 탄압과 차별적이고 중층적인 국민 분할’이 주류가 되고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분할과 갈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국가권력의 정치적 요구이자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요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은 다양한 차별을 통한 더 많은 ‘소수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소수자’란 말은 수적인 의미에서 ‘다수’의 반대말인 ‘소수’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구조 상 ‘약자’라는 의미의 ‘소수’를 지칭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소수자’가 다수가 된 언어적 아이러니가 여기서 발생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넘어서는 반차별운동, 지금 진보는 어떠한 진보와 해방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인권오름 제 81 호 [기사입력] 2007년 11월 28일 21: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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