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모순: 차별

[기획] 차별금지법안 뜯어보기 (20-끝) 차별금지법안과 인권

류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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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일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고용 등 다양한 차별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행위를 금지하면서 피해자 구제 절차를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최초의 종합적인 차별금지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의 경험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과 함께 성적지향 등 다수의 차별사유를 제외함으로써 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 또한 존재해 우려를 더하고 있다. <인권오름>은 그동안 반차별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연속기고를 통해 정부의 차별금지법안이 과연 다양한 ‘소수자들’의 차별 현실을 바꾸고 반차별 의식을 확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점검한다. <편집인주>


어수선한 한국 사회 모퉁이에서 울먹이고 있는 법안이 있다. 2007년 말 입법 예고된 ‘차별금지법안’이다. 이 법안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국가인권위가 지금까지 차별 진정을 받아왔으니 정부는 부담 없고 안전한 수준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데 기업의 고용과 해고의 자유를 간섭하는 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이 통째로 바뀌지 않는 이상 차별하지 말라는 법을 만든다고 해서 차별이 없어지겠느냐’, ‘실제 차별을 당해 이 법에 호소한다고 뭐 얻을 게 있겠어, 실효성 있는 차별구제방안은 다 빠져버렸는데’….

다양한 시각과 문제제기에 대해 숙고할 여지도 없이, 법안에 원래 있었던 차별 사유 중 7개 사유(성적 지향, 학력, 가족형태 및 가족 상황, 병력, 출신국가, 언어,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를 무더기로 삭제해버린 ‘도발’이 더 큰 문제가 됐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법안에조차 끼어줄 수 없다고 하니, 그런 차별 사유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한국사회의 차별구조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차별의 노골적인 긍정

차별을 금지하겠다는 법안이 오히려 차별을 고조시키게 됐다. 차별 사유에서 삭제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으니 말이다. 물론 “--등의 이유로”라고 하여 법에 분명하게 열거되지 않은 사유에 의한 차별도 금지하고 있지만, 그건 법을 만들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교과서적 이야기다. ‘성적 지향’ 등이 차별사유에 포함되는 것을 저지한 쪽에서는 자신들이 싫어하고 반대한 차별사유가 삭제된 것을 ‘차별해도 된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의 이야기다.

이 문제는 차별금지법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와 겹쳐지면서 더 악화된다.

인권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예로 국가는 종교에 의한 차별 다음으로 인종에 의한 차별을 금지했다. 또한 국가에 의한 차별행위를 우선 금지했고, 그것의 적용을 사적인 개인과 기업의 행위로 확장하는 것은 더뎠다. 그런데 국가에 의해 차별행위가 법으로 금지되면 될수록 차별 대상에 대한 존중이 비례하여 높아졌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국가법에 의한 차별금지를 이유로 원래 갖고 있었던 그 대상에 대한 증오와 반감이 높아지고 더 노골적으로 긍정된 것이 현실이다. 법에 의해 사실상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법으로 차별을 금지하기만 하면 되는 손쉬운 의무를 택하고, 사실상의 차별 시정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의무에 대한 채근을 벗어나려 했다. 법에 의한 평등이 진행됨에 따라 사적차별은 더 완강히 진행되고 전자가 강조될수록 후자는 소홀히 취급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국가법에 의해 명시적으로 금지돼도 차별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데, 하물며 ‘법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는 단계에서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배제했을 때는 ‘국가조차도’ 그들을 주권의 동등한 참여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혹자가 말하듯이 배제된 이들을 시민이 아니거나 시민이 덜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인권이 만들어낸 차별

인권은 누구나 입에 올리듯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옹호한다. 모든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힘을 갖는다고 봤고, 이 똑같은 힘을 권리라고 했다. 똑같은 권리를 갖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자신이 갖는 힘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발휘하여 자신의 삶을 꾸릴 자유와 다른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을 평등을 갖는다고 했다.

이런 인권의 논리에 기초해 신분제 사회를 타파했고, 인권보장을 명분으로 한 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현실의 정치‧경제적 힘은 나누고 공유하기를 거부하며 배타성을 톡톡히 발휘하는 방향을 취했다. 많은 권리 중에서도 재산에 기반을 둔 권리를 인권의 이름으로 맹렬히 옹호하게 됐다. 배타적인 지배와 소유를 합리화하자니 그런 지배의 명분이 된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이란 명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차별을 정당화할 구실을 만들어내야 했다.

왜 권력과 자원에 누구는 접근할 수 있고 누구는 그럴 수 없는가? ‘이기심의 자유경쟁’에만 자유와 평등을 열어놓고 사회경제적 힘에 대한 접근과 공유를 막기 위해 임의로 겨누는 표적이 선택됐다. 표적이 된 이들과 권력집단이 가진 차이를 과학과 철학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부정적으로 도색했다. 사람이 갖는 자연적 차이(성, 나이, 피부색 등)와 사회적 조건(학력, 지역 등)에 있는 차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차별화했고, 때론 ‘보호’의 이름으로 구별을 정당화하고, 전근대적 관습의 탓으로 돌리는 동시에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자유롭고 평등한 모든 인간’ 사이의 위계와 서열 구조를 정당화했다. 부정적인 도색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목적이 된 권력과 경제적 이익보다 더 끈질긴 형태로 남게 됐다. 식민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등이 인권의 진전과 더불어 강화됐다는 것이 인권의 질긴 모순이다.

차별의 결과

고의적으로 구별된 차이를 선택하고, 부정적인 도색을 그 차이에 입히고, 그것을 근거로 권력과 자원에 대한 접근을 제도적으로 박탈하는 과정을 거친 차별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열등감이라는 만성질병을 안겨준다. 소위 주변부, 사회적 약자, ‘안 보이는 사람들’로 지칭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표적이 된 대상과 거기에 따라붙는 형용사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이 공격적인 것이건 온정적인 것이건 꼬리표는 열등감을 주입한다. ‘배려’라는 말은 항상 배려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뭉개버려’라는 말과 질적으로 차이가 없을 때가 많다. 주입된 열등감은 사회경제적 배제를 당연히 받아들이게 하고, 마찬가지로 지배집단은 지배를 당연시할 수 있다.

분열을 획책한다. 차별의 목적이 원래 사회경제적 힘의 분배와 공유를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에 ‘다름’ 속에서도 우열을 따지고 얼마 안 되는 떡고물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으로 치닫게 만든다. 그 속에서 누구의 어떤 무엇과 싸우는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자신을 차별하는 ‘사람값’에 분노하면서 마찬가지로 차별당하는 동료 인간에게 등급을 매기고 그 값어치에 따라 서로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이기심의 자유경쟁을 자유라 여기고, 돈 벌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것을 평등이라 여기는 속에서, 이른바 발전의 자극제라는 ‘적당한’ 불평등은 자기와 사회발전의 자극과 동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애초에 경주를 포기하게 만든다.

차별과의 싸움은 없는 문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기심의 자유경쟁과 그 게임 규칙을 떠나 사회연대의 고리로 연결된 자유와 평등의 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차별과의 한판승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88 호 [기사입력] 2008년 01월 24일 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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